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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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덕 「사월 비」
쓰다듬거나 모으지 않아도 괜찮아 샌드위치를 반으로 자르고 빠져나온 아보카도를 줍고 들기 남김없이 먹기 손에서 손 아닌 걸 빼 보세요 무엇이 남는지 무엇이 가는지 무엇이 소리치는지 보고 그래도 두세요 그러니까 궁금해하지도 따뜻해지지도 움켜쥐지도 않기 세계는 이미 한 번 죽은 재료들 열렬하게 포기해 상한 냄새를 좋아해요 전등의 것도 식탁의 것도 아닌 그림자가 손바닥에 떠 있다 의지 없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오늘은 우산을 들고 좋아하는 샌드위치 가게에 갈 거야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갈 거야 이마에 떨어진 빗방울만 믿고 비가 오는구나 작게 뱉어 볼 것 떨지 않아도 좋지만 떨어도 좋다 김연덕, 재와 사랑의 미래, 민음사, 2021
2021.08.19 -
최현우 / 발레리나
최현우 / 발레리나 부슬비는 계절이 체중을 줄인 흔적이다 비가 온다, 길바닥을 보고 알았다 당신의 발목을 보고 알았다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이 처음 춤이라 불렸고 바람을 따라 한 모양새였다 날씨는 가벼워지고 싶을 때 슬쩍 발목을 내민다 당신도 몰래 발 내밀고 잔다 이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듯이 길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에 보니 당신의 맨발이 반짝거린다 간밤에 어딘가 걸어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높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당신이 자꾸만 가여워지고 있다 최현우 / 발레리나 * 발레의 점프 동작. (최현우,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2020) https://..
2020.03.22 -
석지연 / 우리가 네가 아니었을 때
석지연 / 우리가 네가 아니었을 때 비는 약속 없이 오기로 한다 심장박동처럼 폭우가 쏟아지자 처음으로 나는 안녕을 묻는다 그곳의 여름은 마음에 드니? 나는 네 이름을 마주하기 위해 내 슬픔을 소모할 거야 새를 추방하는 나뭇가지를 이야기할 때 네가 앉아 있는 곳은 뒤바뀐 나의 배경이다 꽃잎은 오래 젖어 차창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안에 한때 우리가 있었는데 우산들이 한꺼번에 펴지자 너는 보이지 않는다 내 왼편 어깨 위 빗방울은 네 오른편 어깨의 자국과 같은 것 심장은 멈추지 않고 우산은 매일 챙기기로 한다 이곳의 여름은 네가 부재하므로 써진다 너는 안다 우리를 지우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남는다는 것을 석지연 / 우리가 네가 아니었을 때 (편집부, 시와 미학 가을호, 가림토, 2013) h..
2020.03.02 -
양안다 / 오전 4시, 싱크로니시티, 구름 조금, 강수 확률 20%
양안다 / 오전 4시, 싱크로니시티, 구름 조금, 강수 확률 20%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웃으면 입은 반짝이게 되는 걸까 해변을 걷다 보면 달이 뜨고 달빛이 수면 위에서 반짝이고 나는 그것을 조약돌이라고 착각했다 작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마다 너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좋아하는 약속 시간은 곧, 이었다 우리는 인적 드문 곳에 앉아 서로의 입에 알약을 넣어주었다 시간이 흐르면 흔들리는 두개골에 못을 박고 싶겠지만 밤의 산책자들, 우리를 지나가며 혀를 차는데 저들을 죽일까 날카롭게 갈린 돌 하나를 뒤통수에 박고 너와 도망치고 싶다 이 행성에서 넌 숨을 쉴 수 있다 네가 숨 쉬는 곳은 한 줌의 주먹 안에 존재하는 우주였다..
2020.02.28 -
신미나 / 연애
신미나 / 연애 비가 올 거라고 했고 우산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했다 당신은 우산을 착착 접은 뒤 사거리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널 것이다 비가 올 것 같다는 말은 어쩐지 희미해 눈을 감으면 4층에서 1층까지 차례로 전등에 불이 들어온다 티스푼으로 뜬 것처럼 빗물이 파낸 작은 홈들이 길게 이어진다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는다 약지에 흰 띠가 남아 있다 신미나 / 연애 (신미나, 싱고, 라고 불렀다, 창비, 2014)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