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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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진 / 버드맨
김정진 / 버드맨 줄곧 날개였던 뼈는 더이상 날개이기를 그치고 어깨가 된다 이름이 예뻐서 외웠던 나무는 자라보니 어느새 멸종한 뒤여서 내 눈꺼풀 속 밤하늘에는 웬일로 별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방문을 열면 거기엔 이름도 예쁜 네가 있고 창문틀에 앉아 햇볕 쬐는 고양이가 있고 눈이 부신 고양이는 오도카니 빛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뛰어내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타워는 유명해진다지 하늘이 수면(水面)처럼 일렁이면 무력감에 침몰한 마음들이 도리 없이 많이도 떠올랐다 해바라기 전부 쓰러진 해바라기 동산에는, 숨을 곳이 없는 해바라기 동산에는 빛을 운구해 가는 새들의 행렬이 그와 같이 이어지고 그 탓에 저녁은 석양도 없이 희게 몰려와 옥상 위에 정박한다 나무에게 남은 게 이름뿐이라도 계절이 되면 잎이 돋..
2020.07.17 -
오은 / 아이디어
오은 / 아이디어 한 줄기 빛은 한 줄기 빛 발아가 이루어지면 한 포기 난초와 한 떨기 장미로 피어난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엄습하는 것들을 사랑해 때때로 우리가 직접 나서서 그것들을 잡기도 하지 커피의 김과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커서는 껌벅거리며 최면을 걸고 은밀하게 시작되는 한낮의 점성술 우리는 별처럼 빛나는 순간을 기다려 우리의 동공이, 우리의 동맥이 현장을 사로잡는 순간을 기다려 때때로 빛이 너무 커다래서 우리는 터질 듯 벅차올라 땅에 꽂히는 일도 있겠지 바르르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마지막 남은 한 줄기 빛을 울컥 토해내겠지 한 줄기 빛은 한 줄기 빛 땅 위로 봉긋 더욱 또렷하고 아름답게 피어나 원음보다 선명한 메아리처럼 우리는 분위기를 장악..
2020.03.18 -
박세미 / 잠옷
박세미 / 잠옷 그것은 마침내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야 빛이 내 쪽으로만 휘어지는 것 같을 땐 모든 게 엉망진창이지 가슴 위에 있는 마음이라면 몸을 뒤집고 누워 두 손등을 베개 밑에 묻고 나도 모르는 잘못을 빌어야지 내가 나의 숨소리를 듣기 싫으면 이어폰을 끼고 잠들면 되고 숨소리가 느껴지지 않으면 굳이 깨어날 필요도 없으니까 악몽에게 잠옷을 넘겨주고 돌아오는 몸 두 손이 내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와 나를 통째로 들어올려도 절대 발을 버둥거리지 않아야지 어디에서, 깨어나려고? 박세미 / 잠옷 (박세미, 내가 나일 확률, 문학동네,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8 -
진은영 / 가족
진은영 / 가족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진은영 / 가족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1 -
장석남 / 옛 노트에서
장석남 / 옛 노트에서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장석남 / 옛 노트에서 (시요일,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미디어창비,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