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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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성탄전야」
자정 너머 TV 속의 성탄절 합창제를 보고 있었다 흑인남자의 구렁이 같은 입 안에서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거룩한 밤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멜로디는 아이의 입 속에서 굴러나온다 종이피아노는 한 번도 소리낸 적이 없다 아이는 피아노 건반을 입 속에 구겨넣는다 거룩한 밤 나는 TV 속으로 들어가 남자의 입을 틀어먹았다 내 입 속에서 부러진 건반들이 쏟아져나왔다 거룩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옆집 아이들과 산타할아버지가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거룩한 밤 거룩한 TV 속에 나 혼자 있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건반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거룩한 밤을 연주했다 사람들이 눈을 뭉쳐 TV 속으로 던졌다 나는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검고 하얀 뼈들을 하나씩 뽑아냈다 내 비명이 리듬을 타고..
2022.01.13 -
이민하 「비어 있는 사람」
창살만 남은 늑골 사이로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금은 저녁일까 아침일까 십 년 만에 눈을 뜬 것만 같아 끄고 잠든 별빛처럼 지붕도 함께 사라진 것일까 이대로 일어날 수 없다면 의사들이 달려올까 용역들이 달려올까 밤에 지나는 사람은 플래시를 들고 오고 용감한 휘파람으로 제 몸을 끌고 오고 담력 테스트를 하려고 사람들이 몰려올지도 몰라 죽어 버린 장소는 죽은 사람보다 무섭고 벽이 헐리기 전까지 깃드는 건 소문과 어둠뿐인지도 몰라 숨어 있기 좋아서 고양이들은 움푹한 옆구리로 파고들고 헐거운 뱃가죽에 눌러앉았다 뼈가 닳고 있는데 모래가 날린다 모래는 어느 구석에 또 쌓여서 불빛을 부르고 휘파람을 부르고 우리가 다시 사랑을 한다면 태양보다 뜨거운 검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사랑을 한다면 어..
2021.07.29 -
양안다 / 안녕 그러나 천사는
양안다 / 안녕 그러나 천사는 언젠가 인간은 천사였던 적이 있지 않을까. 너의 날개 뼈를 만지면서. 폭약이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드는 새벽. 너는 붓을 적시며 말한다. 악마도, 이 세상의 조류도 모두 날개 뼈를 갖고 있다고. 종이가 되길 원한 나무는 너로 인해 하나의 그림이 되어가는 중인데. 어느 신화에 따르면 태양과 달을 신의 눈동자라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짐승의 두 눈일지도. 전생에 우리는 꽃이었을지도 몰라. 나는 너의 머리칼을 쓸어 모으면서. 아니. 나는 물이었을 거야. 물을 만질 때마다 불안이 전부 씻겨 내려가거든. 폭약이 우리 불안을 뒤흔드는 새벽. 네가 그린 꽃은 호수에서 목을 적시고 있었다. 짐승의 등 위로 나뭇잎이 돋아나고. 인간은 누군가를 ..
2020.11.29 -
신해욱 / 이렇게 추운 날에
신해욱 / 이렇게 추운 날에 이렇게 추운 날에. 열쇠가 맞지 않는다. 이렇게 추운 날에.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뭘까. 이 어리석음은 뭘까. 얼음일까. 얼음의 마음일까. 막연히 문을 당기자 어깨가 빠지고 뼈가 쏟아지고 쏟아진 뼈들이 춤을 출 수 없게 하소서 경건한 노래가 굴러떨어지고 뼈만 남은 이야기에 언젠가 눈이 내리는데 깨진 약속들이 맹목적으로 반짝이게 되는데 일관성을 잃은 믿음과 열쇠와 열쇠 구멍과 이렇게 추운 날에. 너는 있다. 여전히 있다. 터무니없이 약속을 지키고 있다. 아주 다른 것이 되어 이렇게 추운 날에 모든 밤의 바깥에서 신해욱 / 이렇게 추운 날에 (신해욱, 무족영원, 문학과지성사, 2019) https://www.instag..
2020.07.02 -
임성용 / 아내가 운다
임성용 / 아내가 운다 막걸리를 마시고 아내가 운다 적금통장과 육십 만원 월급을 내놓고 혼자, 새벽까지 운다 나는 그 울음 곁에 차마 다가설 수 없다 눈물을 참으라고 등 다독이며 함께 울어주거나 손수건을 건넬 수 없다 그것은 너무 뻔한 위선이라서 말없이 이불을 쓰고 잠자는 척한다 미안하다는 말이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자는 말이 더 불행한 약속임을 왜 모르겠는가 애초에 나 같은 사람 만나지를 말지 억지를 부리면 부릴수록 하나씩 부러지는 아내의 뼈 진짜 아픈 건 뼈마디에 도사린 꿈이다 울음 눈물 참고 죽을 때까지 허약한 꿈을 믿고 산다는 건 얼마나 무서운 악몽인가 차라리 악다구니를 쓰고 멱살을 잡고 집을 뛰쳐나가 끝장을 내는 것보다 밤새 흐느껴 운 아내가 씽크대 서랍에 약봉지를 숨겨놓고 또 아침이..
2020.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