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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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어느 날 구글 검색을 하다가」
이 손바닥만 한 땅덩이에서 아버지는 일생을 소와 함께 살았고 나는 월급봉투로 살았다 지금 나의 자식들은 카드로 산다 카드의 마그네틱 자성은 원래 빅뱅 때 우주에서 날아온 것이고 하늘에는 아직 반짝이는 별이 많다 언젠가 텍사스에서 카드를 긁고 서울에서 결재하며 금전이 하늘을 어떻게 오가는지 오래 바라보았다 사는 게 도깨비놀음이다 그러나 지피에스로 찍고 내비게이션만 있으면 사실 이 세계라는 것도 별게 아니긴 하지만 어느 날 구글지도 검색을 하다가 바다로 떨어질까 봐 대륙의 가파른 등짝에 한사코 매달린 내 땅을 보니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는 게 다 용하다 문광영, 좋은 시, 이렇게 읽는다, 미소, 2017
2021.01.20 -
석민재 / 못
석민재 / 못 머리에 박힌 못이 자주 빠져나왔다 싹수가 노란 못이 자꾸 튀어나왔다 못된 아이라고 아버지가 내 머리에 망치질을 했다 우리 집은 가위보다 망치가 더 빨리 닳았다 박힌 못을 뽑다가 두통이 오면 도로 박았다 두통이 심할수록 소리가 크게 났다 박힌 나보다 박은 아버지가 더 아파하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납작한 못대가리로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무리 아버지의 손바닥에 박힌 못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 역시 모른 체했다 박을수록, 더 단단하게 박힐수록 서로 모른 체하기 편했다 아버지는 요즘도 못을 박는다 벽마다 주렁주렁 가족들이 걸려 있다 내가 방바닥에 툭 떨어지자 아버지가 망치를 들고 온다 나는 못 하나에 꼼짝 못 하는 척을 하고 아버지는 아직도 힘이 센 척을 한다 석민재..
2020.11.10 -
김경주 / 먼저 자고 있어 곁이니까
김경주 / 먼저 자고 있어 곁이니까 진정제를 맞고 나는 웃는다 이상한 매를 맞은 소년처럼 웃는다 책상 서랍에 두고 온 책받침 생각처럼 웃는다 문을 만지면 손바닥이 노래진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너한테 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없었지만 말을 사랑하는 우리의 숫자들이 웃는다 문을 열면 회복실일까? 이야기나 짜는 생활이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되지 이 이야기를 생활로 바꾸어도 시가 되지도 않겠지만 문을 닫아 두면 줄타기나 줄넘기나 거기서 거기란 생각 어느 날 이상하게 슬픈 플립을 연 후 잠들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먼저 자고 있어 곁이니까 내 눈에게 보내는 타전이었다 김경주 / 먼저 자고 있어 곁이니까 (김경주, 시차의 눈을 달랜다, 민음사, 2009) ht..
2020.02.28 -
하재연 / 양양
하재연 / 양양 물고기를 잡아야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네 손바닥에 놓인 것이 조용했다. 해마도 물고기냐고 물었다. 해마는 말을 닮은 물고기라고 했다. 눈 뜬 해마는 식물 같아, 수컷이 새끼를 낳는다지. 너는 해마가 약으로도 쓰인다고 멸종 위기라고 물에 사는 고기들이 다 고기인 건 아니라고. 다음 날이 도착했는데 죽은 해마와 나는 사람이 먹어야만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하재연 / 양양 (하재연, 우주적인 안녕, 문학과지성사,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