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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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목 「할린」
하루는 보다 못한 그가 궁금한 것이 있다면 할린에게 물어보라 했다. 할린은 죽은 자이지만 묻는 것에 대답하는 자이며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지만 믿기도 하여서 할린 그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나는 내가 죽는 날을 알고 싶었다.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날을 향해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아마도? 나는 어떻게 죽는지 그 또한 알고 싶었다. 그런 게 왜 알고 싶어? 넌 알고 싶지 않아? 난 알고 싶지 않아 네가 알게 된 것을 내게는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언제 죽는지 어떻게 죽는지 모르고 싶어? 모르고 싶어 너는 알고 싶은 게 없어? 나는 알고 싶은 게 없어 아는 것도 전부 잊었으면 좋겠어 나도? 가끔은 ..
2021.01.13 -
김하늘 / 여분의 고백
김하늘 / 여분의 고백 나를 깨닫던 어떤 하루는 나태하게 외로워할 시간이 있고, 살 수 없을 것 같은 기다림이 있고, 과식할 꿈이 있어서, 그토록 자유롭지 못했어 그건 아마 버림받은 영혼의 유언 볼에 Bisou를 받지 못한 아침은 축복을 빌어 줄 이가 없고, 끝없이 흔들릴 마음이 있고, 그러나 기도하는 손이 부끄럽지 않기에 사랑해, 라는 말이 입버릇이 되어 네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정말이야 김하늘 / 여분의 고백 (편집부, 계간 파란 겨울호, 파란,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11 -
황인찬 / 실존하는 기쁨
황인찬 / 실존하는 기쁨 그는 자꾸 내 연인처럼 군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와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대고 가만히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 체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아파트 단지의 밤 가정의 빛들이 켜지고 그것이 물가에 비치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가 검게 타들어 가는데 이제 시간이 늦었다고 그가 말한다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 다음에 꼭 또 보자고 한다 나는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고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잠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황인찬 / 실존하는 기쁨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8.20 -
윤성학 / 데미안
윤성학 / 데미안 시간은 알을 깨고 나온다 가스레인지 모서리에 계란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을 깨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자신이 낳은 알을 쪼고 있었다 琢탁琢탁 계란이 가장 맛있는 프라이로 되는 시간은 2분이며 세상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이분법이지 헷세가 탁자 위에 계란을 돌리며 말했다 돌던 계란을 잡았다가 놓았을 때 그대로 탁, 멈추면 삶은 알 멈추는 듯 다시 돌기 시작하면 날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가 슬픈 것은 관성 때문이었어 헤, 헷, 헷세가 말을 더듬었던 것도 같은데 관성이 삶에 작용한다는 것은 그 삶이 삶겨지지 않은 까닭이므로 젊은 시인이 슬픈 것은 관성 때문이 아니라 네가 가진 계란은 죽었니 살았니 묻는 이분법 어느 날부턴가 누군가 묻지 않아도 그 물음이..
2020.03.01 -
장석남 / 옛 노트에서
장석남 / 옛 노트에서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장석남 / 옛 노트에서 (시요일,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미디어창비,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