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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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 / 도플갱어
손미 / 도플갱어 문을 닫자 이곳은 암전이다 우린 재채기로 서로를 알아봤다 새벽 네 시, 당신을 찾으려 냉장고 속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데리러 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알몸으로 한 칸씩 부서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한 움큼 집어 갔다 추락한 후 우리는 딱 한 번 만나 시계를 똑같이 맞추고 헤어졌다 당신은 정전된 과일을 밟으며 갔다 당신이 조립한 마지막 칸 그 방에 걸려 있는 그림 속 쌓인 사탕 더미에서 오렌지 주스가 흐르는 새벽 네 시 나는 야채 칸 모양으로 오랫동안 녹아 있었다 우리의 고향은 아주 먼 곳이지만 당신과 나는 딱 한 번 만나 발목에 찬 시계를 똑같이 맞추고 헤어졌다 문을 닫으면 북반구의 어둠이 시작되고 이제 당신은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손미 / 도플갱어 (손..
2020.07.31 -
안희연 /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안희연 /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다녀갔어." 그렇게 시작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언제랄 것도 없이 덩그러니 다녀갔다는 말은 흰 종이 위에 물방울처럼 놓여 있었고 건드리면 톡 터질 것처럼 흔들렸다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문밖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일기예보를 통해 날씨를 예견하듯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며 문을 닫았다 탁자 위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고 내가 믿을 것은 차라리 이쪽이라고 여겼다 책을 믿는다니, 나는 피식 웃으며 독서를 이어갔다 "수잔은 십 년도 더 된 아침 햇살을 떠올리며 잠시 울었다." 나는 십 년도 더 된 햇살의 촉감을 상상하느라 손끝이 창백해지는 줄도 모르고 잠시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생각하느라 방..
2020.07.05 -
한강 / 거울 저편의 겨울 5
한강 / 거울 저편의 겨울 5 시계를 다시 맞추지 않아도 된다, 시차는 열두 시간 아침 여덟 시 덜덜덜 가방을 끌고 입원 가방도 퇴원 가방도 아닌 가방을 끌고 핏자국 없이 흉터도 없이 덜컥거리며 저녁의 뒷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강 / 거울 저편의 겨울 5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