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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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규 / 저녁 뉴스
신철규 / 저녁 뉴스 해변에 벗어놓은 옷들처럼 하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공중에 뜬 볼 배트를 든 채 홈베이스를 떠나지 못하는 타자 아직은 너무 이른 것이 아닐까 이 정도에서 그만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네 생각 때문에 거질 바닥에 있던 리모콘을 밟아 박살내고 단추를 잘못 끼우고 엉뚱한 버스를 탄다 손끝까지 타들어온 담배에 손을 데고 신호등 앞에서 무심코 비닐봉지를 떨어뜨린다 야구공이 시야에 나타날 때까지 고개를 꺾고 공중을 바라보는 외야수 야구공을 삼킨 구름 저녁 뉴스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그림자가 길어지다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네 눈 속에는 대관람차가 천천히 돌아가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무심코 올려주려다 빈 물컵을 입으로 가져간다 마지막 구원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 야구화 ..
2020.12.02 -
신철규 / 소행성
신철규 / 소행성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의자만 뒤로 계속 물리면 하루종일 석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너와 나는 이 별의 반대편에 집을 짓고 산다. 내가 밤이면 너는 낮이어서 내가 캄캄하면 너는 환해서 우리의 눈동자는 조금씩 희미해지거나 짙어졌다. 우리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나는 네게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못 보고 지나친 유성에 대해 행성의 반대편에만 잠시 들렀다가 떠난 외계인들에 대해. 너는 거짓말하지 마, 라며..
2020.12.02 -
신철규 / 부서진 사월*
신철규 / 부서진 사월* 시계첨에 매달린 인간들이 땅을 보며 걷는다 어젯밤에 썼던 콘돔은 튼튼한 것이었을까 일본 원전을 덮어씌운 콘크리트는 안전한 것일까 어제 명함을 주고받은 사람이 오늘은 당신을 모른 체하고 지나간다 바닥에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포개졌다가 흩어진다 잠시, 괴물의 형상이 되었다가 딱딱한 혼자가 된다 빈혈에 시달리는 가로수들 나뭇잎의 뒷면에서 어둠이 뚝뚝 떨어져 나무 밑동에 고인다 저 멀리서 온통 눈물로 젖은 얼굴이 걸어온다 그의 자식이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의사에게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은 것일까 그는 자신의 눈앞에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불행들을 손으로 걷어내려는 듯 양팔을 휘저으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눈을 감았다 그..
2020.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