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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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신 「리플리컨트 노트」
단풍이 들면 어떤 결정에 확신을 주듯 비가 내렸다 혹은 그 결정을 머뭇거리게 하듯 비가 쏟아졌다 빗줄기를 묶다 보면 나는 공구 상가 뒷골목의 절단된 환봉처럼 서늘하게 굴러다녔다 자꾸 끊기는 빗줄기 속에서 너희는 투명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며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쇳덩이를 자르고 자루에 담으며 골목을 지키다 보면 나는 달궈지고 깎여나가고 녹아내렸다 쇠를 두드리는 소리는 밤거리를 몇 바퀴 돌다가 너희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냄새 함께 마셨던 차 마지막 순간의 그 눈빛을 돌게 했다 얼굴을 보려는 순간 톱날 내가 시작되는 건 너희가 아직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그곳까지 자라지 못하는 건 톱날 사랑이 없기 때문에 잡초를 뽑다가 펭귄이 딸려 나올 일은 없을 텐데 진심을 담은..
2021.01.01 -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사과가 반쯤 썩었다 아픈 쪽에서 단내가 난다 썩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는 법을 배웠다 죽음의 향기로 내일은 선명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사랑이 크게 들린다 열면 환하고 닫으면 캄캄하다 다친 어깨로 자신의 어둠 쪽으로 돌아눕는 것이다 사랑도 그러하다 썩어가는 사과가 썩지 않는 몸 한쪽을 들여다보듯 이별은 훔친 마음을 다시 훔치는 것이다 이빨을 세게 물고 권투선수처럼 두 뺨으로 웅웅거리는 냉장고 열어도 닫아도 속은 비리다 이별도 그러하다 때린 뺨을 다시 때릴 때 젖은 두 손이 아름답다 두 눈 사이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한 탓이다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서안나, 립스틱 발달사, 천년의시작, 201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0.24 -
이소호 / 밤섬
이소호 / 밤섬 물어뜯긴 손톱이 비로소 마음을 들켰다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우산에서 쫒겨난 어깨처럼 젖어 있었다 이소호 / 밤섬 (이소호, 캣콜링, 민음사,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03 -
서대경 / 흡혈귀
서대경 / 흡혈귀 흑백의 나무가 얼어붙은 길 사이로 펄럭인다 박쥐 같은 기억이 허공을 난다 모조리 다 헤맨 기억이 박쥐로 태어났다 나는 인간의 피를 먹지 않는다 내가 두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면 박쥐가 내 어깨에 내려앉기 까지 한다 서대경 / 흡혈귀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