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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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덕 「white bush」
죽은 듯이 잠자고 깨어난 아침 나는 차가운 연기 속수무책 영토를 넓히는 얼룩들처럼 살아 움직이는 나를 보았다 계단에서 마당에서 처음 보는 현관 앞에서 기도하고 체조하며 어지럽게 얼어붙은 첫 공기와 서성이던 나는 나를 감싸고 보호하던 기름진 빛이 늦은 창피 한 겹이 사라졌구나 나 오늘부터 내가 살아보지 못한 몸으로 살게 됐구나 지대가 높은 구조가 아름다운 이 저택에서 낙엽들로 부산스럽던 지붕 아래서 우기다 눈물 흘리다 갑작스레 쫓겨날 때까지 지친 뿌리 마당 곳곳 파고드는 몸집으로 잠들기까지 긴긴 세월 대저택을 사랑하던 자 벽과 가벽 사이에서 허둥대던 자를 위한 새 이파리 새 현실이 주어졌구나 생활기도도 체조도 잘 되는구나 깨달았는데 우기던 계단과 창백하게 변색된 이파리 어제까지 오르내리던..
2021.08.19 -
이혜미 「손차양 아래」
만들어낸 그늘 밑 잠기는 볕 말려드는 이마와 말들이 겹치는 잠시의 잎사귀 속 죽은 자의 이마에 얹히는 부드러운 흙 같은 그런 색은 불안해 캄캄한 피들을 이어붙여 손 안쪽에 넣어두다니 낯설어진 옆얼굴을 바라보며 눈가에 드리워진 얼룩이 얼굴로 달라붙는데 부러 지어먹은 마음이 절벽을 만들 때 여름을 끌고 오는 손짓들이 미리 당겨 무덤을 쓰나 빛으로 뭉쳐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반만 남은 입술을 바라본다 너의 화환이자 나의 죽은 꽃을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2021.05.06 -
이제니 / 계피의 맛
이제니 / 계피의 맛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마시며 너를 생각한다 몇 마리의 개가 거리 끝에서 거리 끝으로 달려간다 아네모네라는 말이 좋아 아네모네 꽃이 좋았다 손목시계는 손목에서 천천히 낡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수요일이고 화요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됐던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동트는 새벽의 닭 울음 같은 것이 듣고 싶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니 하면서 우는 희고 큰 닭 이제 죽고 싶지는 않니 하면서 우는 희고 큰 닭 꿈속에 두고 온 네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꿈속으로 가려면 나는 조금 늙어야만 한다 얼마간의 잠이 필요하고 얼마간의 망각이 필요하다 지난밤 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계피의 맛 너를 보려고 눈을 감으면 다시 한 번 계피의 맛 몇 개의 창문이 열리고 몇 개의 꽃이..
2020.11.16 -
안희연 /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안희연 /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다녀갔어." 그렇게 시작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언제랄 것도 없이 덩그러니 다녀갔다는 말은 흰 종이 위에 물방울처럼 놓여 있었고 건드리면 톡 터질 것처럼 흔들렸다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문밖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일기예보를 통해 날씨를 예견하듯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며 문을 닫았다 탁자 위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고 내가 믿을 것은 차라리 이쪽이라고 여겼다 책을 믿는다니, 나는 피식 웃으며 독서를 이어갔다 "수잔은 십 년도 더 된 아침 햇살을 떠올리며 잠시 울었다." 나는 십 년도 더 된 햇살의 촉감을 상상하느라 손끝이 창백해지는 줄도 모르고 잠시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생각하느라 방..
2020.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