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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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유 / 사실
임승유 / 사실 여기 영혼이 있어. 불쑥 그런 말을 해버렸다. 숙소를 떠난 지는 한참 되었다. 왜 그런 말을 하냐며 너는 울먹이고 여길 봐. 이렇게 빛나는 이게 영혼이 아니면 뭐겠니. 머릿속이 하얘지는데 이건 아니라며 너는 돌아가자고 한다. 마지막으로 누가 불을 끄고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일어난 일을 따라 걷기로 한다. 멀리 불빛이 보이는 장면은 옛날이야기에 종종 나온다 한번 가면 못 나오는 거다. 알고 있었다. 임승유 / 사실 (임승유,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2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2.29 -
김복희 / 세라핀의 흰 물감 ― 해변에서 잠들기
김복희 / 세라핀의 흰 물감 ― 해변에서 잠들기 아무도 오지 않는 해변이어야 한다 영혼 그녀가 외쳤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영혼 다시 중얼거렸다 들리지 않았다 먼 미래에도, 지금 우리에게 금지된 것을 원하게 된다면 겨우 먼 미래에 대한 상상이 지금 금지된 것에 대한 갈망으로 지어진 짐승 우리라면 누가 누구를 구경거리 삼는 거지 호기심을 갈망이라고 착각하면서 모르는 것을 향해 깨어나는 것 말고는 할 것 없으면서 신에게 물었다 인간은 무엇이냐고 신이 답했다 네가 무슨 꿈을 꾸느냐고 김복희 / 세라핀의 흰 물감 ― 해변에서 잠들기 (김복희, 희망은 사랑을 한다, 문학동네, 202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09 -
김복희 / 데츠로와 나
김복희 / 데츠로와 나 기계가 아이를 낳지 않아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기계가 작동을 멈추고 침묵해도 모든 걸 잊어버려도 우리는 용서한다 뒤에 인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계의 영혼이라고 믿기 때문에 기계가 점을 봐줄 수 있다거나 기계가 사주팔자를 가졌다고 믿지 않는다 시골에서는 종종 눈도 뜨지 않은 개나 고양이 새끼들을 어미 몰래 거둬 땅에 묻거나 물에 빠뜨려 죽였다 가끔 갓난애도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웃 나라에서는 그것을 코케시라고 하여 인형을 집에 둔다고 한다 대개 여자애들이다 기계인간이 왜 되고 싶은지 묻기에 질문이 틀렸다고 답했다 김복희 / 데츠로와 나 (김복희, 희망은 사랑을 한다, 문학동네, 202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09 -
이장욱 / 뼈가 있는 자화상
이장욱 / 뼈가 있는 자화상 오늘은 안개 속에서 뼈가 만져졌다 뼈가 자라났다 머리카락이 되고 나무가 되었다 희미한 경비실이 되자 겨울이 오고 외로운 시선이 생겨났다 나는 단순한 인생을 좋아한다 이목구비는 없어도 좋다 이런 밤에는 거미들을 위해 더 길고 침착한 영혼이 필요해 그것은 오각형의 방인지도 모르고 막 지하로 돌아간 양서류의 생각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 또는 먼 곳의 소문들 개들에게는 겨울 내내 선입견이 없었다 은행원들도 신비로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덜 존재하는 밤, 안개 속에서 뼈들이 꿈틀거린다 처음 보는 얼굴이 떠오른다 이장욱 / 뼈가 있는 자화상 (이장욱, 생년월일, 창비, 201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21 -
허연 /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허연 /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때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은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을 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하얀 망각이 당신을 덮칠 때도 난 시퍼런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기다리고 서 있을 거야. 날 잊지 못하도록,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떨리며 떨리며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허연 / 북회..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