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다른이야기하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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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주 「낭독회」
어두운 방에서 그가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고 나는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촛불이 어둠을 낫게 할 수 있나요? 어둠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촛불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가 눈부셨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며 왼쪽에서 오른쪽 페이지를 읽어나갔다. 우기를 견디는 나무가 다 뽑혀 나가지 않은 것을 일종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를 견디는 어둠이 다 휩쓸려 나가지 않은 것을 언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은 엉키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풀어지지 않는 것. 나누어지지 않는 것. 손바닥과 손바닥이 겹치고 또 겹치다가 빈틈없이 메워지는 마음이 된다면 그것이 어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둠 속에서 형태가 남아 있던 손이 몰래..
2022.01.17 -
조해주 「기일」
가끔 나는 내가 걷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불 꺼진 쇼윈도 속에서 나는 조금 놀란 표정 점집에서 십만 원 주고 결혼 날짜를 받아온 사람이나 금요일 새벽 천국에 대해 무서운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목사를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에 자연사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생일처럼 유일하고 소형 비행기처럼 삐뚤빼뚤한 내가 수없이 비상구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과 그 모든 것을 몰랐다는 듯 우연으로 꾸미려는 계획 또한 죽는 것도 실수할까 봐 걱정된다 오직 자연스러운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부자연스럽지만은 않고 나는 결코 인간다운 걸음걸이로 걷지 않으며 하얗고 길게 펼쳐진 계단의 끝이 팡파레와 천사들의 노래는 아니라는 것이다 시험지 귀퉁이를 하나씩 찢었다 새가 없는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깃털이 육교 위로 흩날렸..
2021.04.16 -
조해주 「다큐멘터리」
나는 달의 입체성을 믿지 않는다. 그것에게 옆모습이 있다고? 원숭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유리 너머의 원숭이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내게 바나나 껍질을 던진다. 원숭이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유리에 비친 자신의 붉은 얼굴과 긴 코트를 입고 멀뚱히 서 있는 내 모습이 겹쳐 있다. 어쩌면 원숭이는 나를 자신의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악몽 같은 형상을 향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원숭이에게 우리이고 내게는 화면인 것. 그것에 얼굴을 가져다 댄다. 유리는 너무 차가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유리와 닿은 부분 말고는 모두 지워지는 기분이다. 원숭이의 공격성이 유리를 깨부술 수는 없을까. 원숭이는 내가 서 있는 곳이 바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거나 등지고 앉지..
2021.04.16 -
조해주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은 지루하다고 말하는 영화를 나는 좋아해, 그렇게 말할 때마다 기분이 좋다 다른 사람보다도 더 먼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아는 사람은 등 뒤에서 갑자기 나를 놀라게 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은 갑자기 해변이 되기도 하고 나는 아아, 하고 길게 아주 길게 눈앞에 서 있는 사람과 마주 선다 점심을 먹는 장면 속의 식당 주인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그 사람은 나의 선생님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음악이었을까 아니면 국어였을까 닮은 사람이라는 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야 영화 속에서 나는 유창한 스페인어로 음식을 주문하면서 비로소 돌아왔어요,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걸로 되겠니?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은 잘 웃는 사람이다 아는 사람은 조금씩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고 나는 좀처럼 영화에..
2021.04.16 -
조해주 「여분」
저녁 먹었어요? 어떤 사람이 그렇게 물어오면 일부러 저녁을 먹지 않는다. 먹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드라마를 본다. 행복해지거나 죽기 직전까지의 이야기. 뉴스를 본다. 신발을 훔치다가 사람을 찌른 적이 있다고 말하려고. 구태여 그것을 전부 이야기하지 않아도 나는 어떤 사람과 저녁에 만난다. 함께 아파트 단지 앞을 지나가는 중이고 길옆으로 검푸른 화단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어떤 사람보다 조금 앞서 걸으면서 화단의 나뭇잎을 잡아 뜯는다. 단지 셔츠의 색깔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행동인데 그는 흩어진 나뭇잎 몇 장을 밟으면서 사뿐히 뒤따라온다. 어디 아파요? 어떤 사람이 나의 안색을 살피면 아프지 않다. 혼자 있을 때 마음껏 아프려고. 시..
2021.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