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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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주 「다큐멘터리」
나는 달의 입체성을 믿지 않는다. 그것에게 옆모습이 있다고? 원숭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유리 너머의 원숭이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내게 바나나 껍질을 던진다. 원숭이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유리에 비친 자신의 붉은 얼굴과 긴 코트를 입고 멀뚱히 서 있는 내 모습이 겹쳐 있다. 어쩌면 원숭이는 나를 자신의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악몽 같은 형상을 향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원숭이에게 우리이고 내게는 화면인 것. 그것에 얼굴을 가져다 댄다. 유리는 너무 차가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유리와 닿은 부분 말고는 모두 지워지는 기분이다. 원숭이의 공격성이 유리를 깨부술 수는 없을까. 원숭이는 내가 서 있는 곳이 바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거나 등지고 앉지..
2021.04.16 -
정우신 「리플리컨트 노트」
다음번 잠은 깔끔하게 넘어갔으면 좋겠다 나는 왜 자꾸 눕지 스르륵 날리지 허리에 흰 천을 감고 내려앉고 싶다 온도가 달라지는 빛을 겪으면서 조금 더 자라고 싶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손의 모양이 달라진다 투명에 가까워진다 생아편이 들어 있는 식물을 가꿀 시간은 없겠지 아늑하고 느리게 이빨을 뽑고 아가미를 달 것이다 낯선 숨을 머금고 너의 꿈속으로 불쑥 찾아갈 것이다 알약을 모으고 신발을 정리했어요 바람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갖고 싶다고 말했어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나를 자주 떠올릴 수 있을지 나를 걱정해주던 그 눈빛으로 내 이마를 쓸어준다면 좋을 텐데 아주 깊은 잠에 빠질 텐데 깨어날 때마다 사라지는 등 평생 불안에 떨며 뛰어다니던 영양은 어느 날 무리에서 이탈하기로 작정했다 내심 ..
2021.01.01 -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사과가 반쯤 썩었다 아픈 쪽에서 단내가 난다 썩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는 법을 배웠다 죽음의 향기로 내일은 선명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사랑이 크게 들린다 열면 환하고 닫으면 캄캄하다 다친 어깨로 자신의 어둠 쪽으로 돌아눕는 것이다 사랑도 그러하다 썩어가는 사과가 썩지 않는 몸 한쪽을 들여다보듯 이별은 훔친 마음을 다시 훔치는 것이다 이빨을 세게 물고 권투선수처럼 두 뺨으로 웅웅거리는 냉장고 열어도 닫아도 속은 비리다 이별도 그러하다 때린 뺨을 다시 때릴 때 젖은 두 손이 아름답다 두 눈 사이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한 탓이다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서안나, 립스틱 발달사, 천년의시작, 201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