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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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 아홉 살
임솔아 / 아홉 살 도시를 만드는 게임을 하고는 했다. 나무를 심고 호수를 만들고 빌딩을 세우고 도로를 확장했다. 나의 시민들은 성실했다. 지루해지면 아이 하나를 집어 호수에 빠뜨렸다. 살려주세요 외치는 아이가 얼마나 버티는지 구경했다. 살아 나온 아이를 간혹은 살려두었고 다시 집어 간혹은 물에 빠뜨렸다. 아이를 아무리 죽여도 도시는 조용했다. 나는 빌딩에 불을 놓았다. 허리케인을 만들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UFO를 소환해서 정갈한 도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선량한 시민들은 머리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내 도시 바깥으로 도망쳤다. 나는 도시를 벽으로 둘러쌌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우지는 않았다. 나의 시민들이 다시 도시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만 나..
2020.09.20 -
임솔아 / 모래
임솔아 / 모래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 스팸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 난간 아래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떨어지라고 응원해주었다 내가 키우는 담쟁이에 몇 개의 잎이 있는지 처음으로 세어보았다 담쟁이를 따라 숫자가 뒤엉켰고 나는 속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술래는 숨은 아이를 궁금해하고 숨은 아니는 술래를 궁금해했지 나는 궁금함을 앓고 있다 깁스에 적어주는 낙서들처럼 아픔은 문장에게 인기가 좋았다 오늘은 세상에 없는 국가의 국기를 그렸다 그걸 나만 그릴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서 벌거벗은 돼지 인형에게 양말을 벗어 신겼다 돼지에 비해 나는 두 발이 부족했다 빌딩 꼭대기에서 깜빡거리는 빨간 점을 마주 보면 눈을 깜빡이게 된다 깜빡이고 있다는 걸 잊는 방법을 잊어..
2020.03.01 -
임솔아 / 오월
임솔아 / 오월 떠다니는 민들레 홀씨 하나를 잡았다. 손바닥에서 하얀 거미가 터졌다. 손바닥을 쥐고 걸었다. 그림자들이 숲의 이목구비를 바꿔 그렸다. 숲의 머리카락이 길어졌다. 껍질이 갈라졌다. 나무들 정수리마다 둥지를 트는 새들을 보았고 나는 내 가마를 만졌다. 웅덩이에 빠졌던 맨발이 발자국을 만들었다. 오월의 맨발이 공원을 만들었다. 뭉텅 피어났고 뭉텅 떨어졌던 꽃들. 나는 차가운 돌 위에 앉아 고여갔다. 바닥에서 끌려다니던 나뭇잎처럼 돌아오지 않는 검은 조각들이 있었다. 발밑의 나뭇잎을 주워 먼지를 털었다. 분명 내 살에서 자라던 것들. 손가락이 젖고 있었다. 검은 잎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베였다. 나와 나뭇잎은 뼈로 닿았다. 왕사슴벌레의 유충이 집이 되어가고 ..
202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