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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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호 「뜰힘」
새를 날게 하는 건 날개의 몸일까 새라는 이름일까 구름을 띄우는 게 구름이라는 이름의 부력이라면 나는 입술이 닳도록 네 이름을 하늘에 풀어놓겠지 여기서 가장 먼 별의 이름을 잠든 너의 귓속에 속삭이겠지 나는 너의 비행기 네 꿈속의 양떼구름 입술이 닳기 전에 입맞춤해줄래? 너의 입술일까 너라는 이름일까 잠자리채를 메고 밤하늘을 열기구처럼 솟아오르는 나에 대해 이현호, 라이터 좀 빌립시다, 문학동네, 2014
2021.07.05 -
이혜미 「손차양 아래」
만들어낸 그늘 밑 잠기는 볕 말려드는 이마와 말들이 겹치는 잠시의 잎사귀 속 죽은 자의 이마에 얹히는 부드러운 흙 같은 그런 색은 불안해 캄캄한 피들을 이어붙여 손 안쪽에 넣어두다니 낯설어진 옆얼굴을 바라보며 눈가에 드리워진 얼룩이 얼굴로 달라붙는데 부러 지어먹은 마음이 절벽을 만들 때 여름을 끌고 오는 손짓들이 미리 당겨 무덤을 쓰나 빛으로 뭉쳐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반만 남은 입술을 바라본다 너의 화환이자 나의 죽은 꽃을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2021.05.06 -
이제니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이제니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 사라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서 너는 희미하게 서 있었다. 감정이 있는 무언가가 될 때까지. 굳건함이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오래 믿는다는 뜻인가. 꽃이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녹색의 잎. 녹색의 잎이 사라지면 녹색의 빈 가지가. 잊는다는 것은 잃는다는 것인가. 잃는다는 것은 원래 자리로 되돌려준다는 것인가. 흙으로 돌아가듯 잿빛에 기대어 섰을 ..
2020.11.16 -
김연아 / 먼지색 입술에 입맞추네
김연아 / 먼지색 입술에 입맞추네 한 사내가 달을 지고 검은 산을 내려간다 밤은 아름답고 멀리서 죽어가는 소리들 나의 내부에선 음악이 멈추었다 내 그림자를 보려고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너무 많은 환각이 나를 갉아먹었다 이 몸의 원시적 발성은 어디서 오는 건가 오늘 언어란 뿌리를 잘못 내린 울음 같아 어떤 진동도 섬광도 없이 당신이 내 안에 스며들어 오고 당신의 아버지의 어머니가 스며들어 오고 나는 그 모든 나이와 함께 있다 연인의 과거를 노래하는 여인처럼 당신의 입술은 잠시 열렸다가 닫혔다 서쪽으로 몰려가는 청회색 구름 같은 암브로시아 성가 흩뿌려진 하얀 재 당신은 삶과 죽음의 숙명적인 쌍 밖으로 표류한다 당신이 타고 있는 배는 아무 데도 없는 곳을 맴돌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2020.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