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3)
-
이수명 「물류창고」
어두워서 잠이 오지 않아 나도 잠이 오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는 눈을 감을 수가 없어 어둠이 보고 있을 때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잠은 엉터리여서 자고 있을 때는 어디를 다쳤는지 알 수가 없어 와인이 도움이 될 거야 잔을 부딪치는 것이 도움이 될 거야 나도 돕는다 같이 마신다 오늘은 머리를 서쪽으로 하고 누웠지 잠은 잘 있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몸이 줄어들어 자고 나면 몸이 다 사라질 거야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거야 이미 깨어 있어서 언제나 깨어 있어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해 아무도 나를 깨우지 못해 나도 그를 깨우고 싶지 않다 이윽고 환해서 아주 많이 환해져서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틀려버릴 거야 그러나 아침이 오면 나는 아직 눈을 뜨고 있는 것 같다 이수명, 물류창고,..
2021.01.16 -
김경후 / 겹
김경후 / 겹 등을 마주 댄 두줄의 척추 우린 나눌 수 없어 잠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태양이 단 하나의 태양을 덮을 때까지 우린 서로의 개기월식일 뿐 올봄 겹벚꽃 한번도 피지 않고 진다 김경후 / 겹 (김경후,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창비, 2017)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8.11 -
문보영 / 불면
문보영 / 불면 누워서 나는 내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내 옆의 새벽 2시는 회색 담요를 말고 먼저 잠들었다 이불 밖으로 살짝 나온 내 발이 다른 이의 발이었으면 좋겠다 애인은 내 죽음 앞에서도 참 건강했는데 나는 내 옆얼굴이 기대서 잠을 청한다 옆얼굴을 베고 잠을 잔다 꿈속에서도 수년에 걸쳐 감기에 걸렸지만 나는 여전히 내 발바닥 위에 서 있었다 발바닥을 꾹 누르며 그만큼의 바닥 위에서 가로등처럼 휘어지며 이불을 덮어도 집요하게 밝아 오는 아침이 있어서 잠이 오면 부탄가스를 흡입하듯 옆모습이 누군가의 옆모습을 빨아들이다가 여전히 누군가 죽었다 잘 깎아 놓은 사과처럼 정갈하게 문보영 / 불면 (문보영, 책기둥, 민음사, 2017) https://www.instagra..
2020.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