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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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혁 「바람 종이를 찢는 너의 자세」
나는 기상청에 당신이 언제 그리울지 물어봤다가 이내 더 쓸쓸해졌다 즐거운 사람들이 많았는데 새벽엔 모두 사라졌다 도표를 그리거나 하며 곡예사나 갈대의 춤들을 창문에 가둬 두었다 급류에 휩쓸려 나부끼는 깃발처럼 우린 젖지 않고도 섬을 이해하지만 여린 눈들이 태풍의 눈이 되어 갈 땐 거울 대신 창고에 들어가 먼지를 가라앉힌 적막을 마주 봐야 했다 함부로 나부끼며 울어서도 안 됐다 창고를 두들기는 사람들에게 찾을 것이 있다고 말하고 창고 밖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는 척해야 했다 한낮에도 나의 문장을 훔쳐 가는 바람과 반대로 걸으며 가여운 마을과 댐을 뜯고 날아간 하얀 염소들의 새끼들을 돌보며 늙고 싶었다 창문으론 쉽게 얼굴들이 비치지만 문을 열고 나면 전쟁뿐이었다 성동혁, 6, 민음사, 2014
2021.01.29 -
최백규 / 열대야
최백규 / 열대야 사랑이 사랑도 아닐 때까지 사랑을 한다 네가 물들인 내 밤이 너무 많다 전국적으로 별일 없이 해거름이 옮아가고 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야경을 바라본다 내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행복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울겠지 지난 주말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외지의 동물원으로 소풍을 갔다 가만히 쓰러진 기린을 구경했다 최백규 / 열대야 (창작동인 뿔,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9.15 -
허연 / 시월
허연 / 시월 혼자 했던 전쟁에서 늘 패하고 있었다. 그걸 시월에 알았다. 잊을 테니까 아프지 말라고 너는 어두운 산처럼 말했다. 다시는 육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시는 길게 앓지도 않겠다고 너는 낡은 트럭에 올라타면서 웃었다. 매미들의 잔해가 마른 낙엽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마을버스를 세 대나 놓치며 정류장에 서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는 못했다.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자동차의 불빛들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화기를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세상의 모든 느낌이 둔탁해졌다. 입맞춤도 사죄도 없는 길을 걸었다. 동네에서 가장 싼 김밥을 팔던 가게 앞을 지나면서 다가올 날들에 대해 생각했다. 방금 운 듯한 하늘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디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고 했다. ..
2020.06.23 -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こ)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こ)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마다 와르르 무너져 내려 엉뚱한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곁에 있던 이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 모를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할 줄 몰랐고 순진한 눈빛만을 남긴 채 모두 떠나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꽉 막혀 손발만이 짙은 갈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마구 걸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흘러나왔다 금..
202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