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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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남 「나는 좀 슬픈가 봐, 갈대가 머리칼 푼 모습만 눈에 들어와」
정량천을 걷는다 내 걸음은 가난한 곳으로 흐르고 줄지어선 갈대가 무심한 표정으로 천변에 널려있다 나도 갈대가 되어 천변 어느 곳에 주저앉아버릴까 그러면 아무 생각 없이 바람 부는 곳으로 따라 흔들리게 될까 이생에서 잠시 머물다 갈 일을 잊고 하루를 하루 같이 여기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세상 소용없는 것이 손에 잡히는 것이란 걸 생각하면서 그럼에도 꼭 잡아야 하는 것을 또 생각하는 것인데 부질없는 것들과 집착하는 것들을 눌러 앉히는 저녁 밟는 곳마다 땅이 질퍽이는데 천변을 따라가면 내 아이 머무는 너른 풀밭이 나올 테고 갈대를 머리에 꽂은 아이가 이쪽을 보고 있을 테고 저 혼자 가을이 되고 있을 아이가 못내 서러워 수첩에 적힌 지도를 펼친다 그곳은 아직 내 발길이 닿지 못하는 곳 스산한 바람이 계절의 행방..
2021.07.25 -
김경주 / 기담(奇談)
김경주 / 기담(奇談) 지도를 태운다 묻혀 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 있다 그 잠을 이식한 화술은 내 무덤이 될까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人形)을 본다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 인간에겐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 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 김경주 / 기담(奇談) (김경주, 기담, 문학과지성사, 200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9 -
김경인 / 금요일에서 온 사람
김경인 / 금요일에서 온 사람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지는 않아요 나는 절룩거렸고 나는 뒤로 걸었고 어제는 청어를 먹고 드라이브를 떠났어요 가시 많은 고슴도치처럼 껴안았죠 우리에겐 지도가 없었고 난 어제, 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지만 설명할 수는 없어요 그건 오른쪽이나 왼쪽일 거예요 흙먼지 속에서 뿌옇게 지워진 내가 걸어왔다면 아마 거길 거예요 사람들은 아주 가끔 신기한 듯 물었죠 너는 참 이상하게 걷는구나, 길을 끌고 다니듯 그건 아마 내 안의 길들이 무릎 아래로 끌어당기기 때문이겠죠 당신이 걷는 길에 내 발자국이 찍혀 있다면 끝나지 않는 골목과 높은 담들 늙어서도 울고 있는 아이를 지나 그렇게 왔을 거예요 그건 긴긴 금요일의 길 위에서였을 거예요 김경인 / 금요일에서 온..
2020.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