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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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안다 / 이명
양안다 / 이명 밤이 되면 속을 게워내고 두 발이 녹고 네가 보였다 너는 환하게 웃고 있다 '날 사랑하니?' 너의 입모양이 보이는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는 너의 존재를 확인하려 자꾸 내게 물었다 너의 입술이 흐려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한낮이었다 너는 사라지고 없는데 어디선가 너의 질문이 계속 들렸다 양안다 / 이명 (양안다,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민음사,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9 -
김복희 / 데츠로와 나
김복희 / 데츠로와 나 기계가 아이를 낳지 않아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기계가 작동을 멈추고 침묵해도 모든 걸 잊어버려도 우리는 용서한다 뒤에 인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계의 영혼이라고 믿기 때문에 기계가 점을 봐줄 수 있다거나 기계가 사주팔자를 가졌다고 믿지 않는다 시골에서는 종종 눈도 뜨지 않은 개나 고양이 새끼들을 어미 몰래 거둬 땅에 묻거나 물에 빠뜨려 죽였다 가끔 갓난애도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웃 나라에서는 그것을 코케시라고 하여 인형을 집에 둔다고 한다 대개 여자애들이다 기계인간이 왜 되고 싶은지 묻기에 질문이 틀렸다고 답했다 김복희 / 데츠로와 나 (김복희, 희망은 사랑을 한다, 문학동네, 202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09 -
신해욱 / 전염병
신해욱 / 전염병 그는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어 했다. 꿈속에서 죽은 쥐가 지금 어디에서 썩고 있는지 아니. 나로부터 썩 물러난 간격을 유지하면서도 그는 나의 눈에 달라붙어 있었다. 끈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침이 가득 고인 입으로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독을 먹은 게 내가 아니라면 그런 게 아니라면 말로 할 수 없는 이런 슬픈 사연이란 무엇일까. 정녕. 나에게 있는 그 아니면 쥐. 열이 있는 그 아니면 쥐. 체온을 유지하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신해욱 / 전염병 (신해욱, syzygy, 문학과지성사, 2014)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8.01 -
안희연 / 12월
안희연 / 12월 겨울은 빈혈의 시간 피주머니를 가득 매단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것만 생각나 입김 한 번에 허물어지는 사람들이 이곳엔 너무너무 많다 너무라고 말하지 않고 너무너무라고 말하는 것 그래도 겨울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겠지 그래서 당신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강도를 높여가는 겨울의 질문 앞에서 나는 나날이 창백해진다 이렇게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도 괜찮을 걸까 기도가 기도를 밟고 오르는 세상에서 헐렁헐렁 산책하는 일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축축한 영혼을 나라고 부르는 일 다행히 겨울은 불을 피우기 좋은 계절이다 나에겐 태울 것이 아주 많고 재가 될 때까지 들여다볼 것이 있어서 좋다 "잘하고 못하는 게 어디 있어, 그냥 사는 거지" 불 앞에서 다 식은 진..
2020.07.05 -
황경신 / 무거운 편지
황경신 / 무거운 편지 편지를 쓸까 했어요. 무슨 말로 시작할까 생각했어요. 생각을 하다 보니 해야 할 말도 없고 할 수 있는 말도 없고 하고 싶은 말도 없었어요. 난 잘 지내기도 하고 못 지내기도 해요, 라는 말도 웃기죠. 아무 내용도 없잖아요. 잘 지내요? 라는 질문도 이상하죠. 못 지낸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잘 지내세요, 도 그래요. 사실 난 당신이 좀 못 지내면 좋겠거든요. 하지만 그런 소릴 할 수는 없죠. 난 잘못한 것도 없이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렸고 이제 와서 그걸 바로잡을 수도 없는데 마음이 어떻든 뭐가 바뀌겠어요. 잔인하죠? 이게 우리의 미래였어요. 황경신 / 무거운 편지 (황경신, 생각이 나서, 소담출판사, 2010) https://www.instagram...
2020.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