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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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나는 모스크바에서 바뀌었다」
나는 무서운 것이 너무 많고 비위도 약하지만 내가 시체 청소부면 좋겠다 초등학교 앞에 시체가 나타나면 아이들이 떼로 몰려서 시체를 둘러싸고 서서 그걸 보고 있다 한마디씩 하는 애들도 있고 아닌 애들도 있지 애들도 시체를 봐야 시체가 어떤 것인지 알겠지만 나는 시체가 너무 불쌍해서 시체를 들고 먼 곳으로 간다 아무도 보고 수군거리거나 침묵하지 않도록 그때 나는 아직 어린아이고 시체는 대부분 축축하고 무겁다 나는 내가 애면 좋겠다 천만 명이면 좋겠다 어린애들이 있는 곳이면 거기 항상 있는 시체가 나타나면 들고 먼 곳으로 가는 모스크바 공항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놓치고 공항에 오랫동안 갇혀서 이런 개고생 좀 그만하려고 나이가 든 만큼 현명해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집에만 있으려고 했던 것..
2021.02.20 -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
2020.12.27 -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요 며칠 인적 드문 날들 계속되었습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한없이 맑고 찬 갈림길이 이리저리 파여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걷다가 지치면 문득 서서 당신의 침묵을 듣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남긴 유일한 흔적입니다 병을 앓고 난 뒤의 무한한 시야, 이마가 마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이 깊이 파인 두 눈을 들면 허공으로 한줄기 비행운(飛行雲)이 그어져갑니다 사방으로 바람이 걸어옵니다 아아 당신, 길들이 저마다 아득한 얼음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21 -
양안다 / 오전 4시, 싱크로니시티, 구름 조금, 강수 확률 20%
양안다 / 오전 4시, 싱크로니시티, 구름 조금, 강수 확률 20%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웃으면 입은 반짝이게 되는 걸까 해변을 걷다 보면 달이 뜨고 달빛이 수면 위에서 반짝이고 나는 그것을 조약돌이라고 착각했다 작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마다 너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좋아하는 약속 시간은 곧, 이었다 우리는 인적 드문 곳에 앉아 서로의 입에 알약을 넣어주었다 시간이 흐르면 흔들리는 두개골에 못을 박고 싶겠지만 밤의 산책자들, 우리를 지나가며 혀를 차는데 저들을 죽일까 날카롭게 갈린 돌 하나를 뒤통수에 박고 너와 도망치고 싶다 이 행성에서 넌 숨을 쉴 수 있다 네가 숨 쉬는 곳은 한 줌의 주먹 안에 존재하는 우주였다..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