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마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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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신 「리플리컨트 노트」
단풍이 들면 어떤 결정에 확신을 주듯 비가 내렸다 혹은 그 결정을 머뭇거리게 하듯 비가 쏟아졌다 빗줄기를 묶다 보면 나는 공구 상가 뒷골목의 절단된 환봉처럼 서늘하게 굴러다녔다 자꾸 끊기는 빗줄기 속에서 너희는 투명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며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쇳덩이를 자르고 자루에 담으며 골목을 지키다 보면 나는 달궈지고 깎여나가고 녹아내렸다 쇠를 두드리는 소리는 밤거리를 몇 바퀴 돌다가 너희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냄새 함께 마셨던 차 마지막 순간의 그 눈빛을 돌게 했다 얼굴을 보려는 순간 톱날 내가 시작되는 건 너희가 아직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그곳까지 자라지 못하는 건 톱날 사랑이 없기 때문에 잡초를 뽑다가 펭귄이 딸려 나올 일은 없을 텐데 진심을 담은..
2021.01.01 -
이병률 / 미신
이병률 / 미신 필명을 갖고 싶던 시절에 두 글자의 이름 도장도 갖고 싶어 도장 가게에 가서 성과 이름을 합쳐도 두 글자밖에 인 되는 도장을 파려고 하는데 돈을 적게 받을 수 있느냐 물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여백을 파내야 하는 수고가 있으니 오히려 더 받아야겠다는 도장 파는 이의 대답을 들었다 다 늦은 그날 밤 술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 한 잔만 더 마시면 죽을 수도 있고 그 한 잔으로 어쩌면 잘 살 수도 있겠다 싶어 들어간 어느 포장마차에서 딱 한 잔만 달라고 하였다 한 잔을 비우고 난 뒤 한 병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주인이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당신이 취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한 잔이 아니었냐며 주인은 헐거워진 마개로 술병을 닫았다 바지 주머니엔 도장이 불룩하고..
2020.08.10 -
권혁웅 /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권혁웅 /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포장마차 가본 게 언제인가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견디고 있을 것이다 크기에 빗댄다면 대합탕 옆에 놓인 소주잔 같을 것이다 방점처럼, 사랑하는 이 옆에서 그이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바로 그 마음처럼 참이슬은 조각난 조개의 조변석개를 안타까워할 것이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는 들큼한 취객의 등이여, 당신도 오래 견딘 것인가 소주병의 푸른빛이 비상구로 보이는가 옆을 힐끗거리며 나는 일편단심 오리지널이야, 프레쉬라니, 저렇게 푸르다니, 풋, 이러면서 그리움에도 등급을 매기는 나라가 저 새벽의 천변에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지만 혼자서는 끝내 가지 않을 혼자라서 끝내 갈 수 없는 나라가..
202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