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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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리 「꽃과 생명」
은은한 불빛의 회복실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비로소 반지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호사는 마취가 풀리려면 세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절대 자세를 바꾸지 말고 그대로 누워 있으라고 했다 회색 커튼 너머로 어느 한 노인이 마른기침을 하며 오줌통에 소변을 보고 있었고 적당한 무기력은 몸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퇴원하는 날 새로운 반지를 하나 살 거라고 말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주사도 빼 드릴게요 같은 말들이 일상적으로 들렸고 너는 이곳의 벽이 흰색이 아니라 하늘색이어서 좋다고 했다 그런 건 참을 수 있었다 바지에 묻은 소고기뭇국을 스스로 닦을 수도 없을 때마다 밀려오는 아침 속에서 항생제가 한 방울씩 낙석처럼 떨어질 때마다 주먹을 쥐어 보기도 하고 옷을 벗어 봉합된 자국을 ..
2022.01.13 -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사과가 반쯤 썩었다 아픈 쪽에서 단내가 난다 썩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는 법을 배웠다 죽음의 향기로 내일은 선명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사랑이 크게 들린다 열면 환하고 닫으면 캄캄하다 다친 어깨로 자신의 어둠 쪽으로 돌아눕는 것이다 사랑도 그러하다 썩어가는 사과가 썩지 않는 몸 한쪽을 들여다보듯 이별은 훔친 마음을 다시 훔치는 것이다 이빨을 세게 물고 권투선수처럼 두 뺨으로 웅웅거리는 냉장고 열어도 닫아도 속은 비리다 이별도 그러하다 때린 뺨을 다시 때릴 때 젖은 두 손이 아름답다 두 눈 사이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한 탓이다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서안나, 립스틱 발달사, 천년의시작, 201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0.24 -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창문이 흰 계절이 온다 몸을 열자 동백나무 우거진 숲 당신이라는 검푸른 관자놀이를 통과하는 한 발의 총성 산산히 깨진 당신을 밟고 맨발로 당신이라는 시간을 걷는다 땀구멍마다 침투하는 당신의 쇳소리가 밤마다 내 몸을 흔든다 모가지째 뚝뚝 당신이 순교한다 나는 가장 벙글지 않은 당신을 주워 탁자 위 꽃병에 꽂는다 이미 죽은 당신의 입술이 벌어지며 그윽한 향기가 흘러나온다 시시각각 피어나며 시드는 당신이라는, 붉은, 짙은, 어지러운, 너덜너덜한 꿈의 자락을 들어 냄새를 맡으면 곧 자욱한 눈보라 으스스한 핏빛 잎들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계절 창문이 흰 계절 위에 손가락으로 당신을 쓴다 가장자리부터 얼어붙는 이름을 쓴다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이용임, 안개주의보, 문학과지성사, ..
2020.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