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12)
-
황인찬 「빛」
― 너는 아름답다는 말이 되게 쉽게 나오더라 ― 그게 나쁜 일인가 너는 화면을 보지 않은 채 대답을 한다 그쪽은 지금 봄이라고 했던 것 같다 창밖이라도 보고 있는 것이겠지 가득 핀 벚꽃이 바로 보이는 곳이라 했다 나는 실험동물이 새끼를 밴 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너는 그걸 듣고 아름답다고 했던 것이다 ― 뭘 보고 있는 건데 ― 아무것도 내 오른쪽으로는 남극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희거나 푸른 것만 가득해서 가끔은 이 모든 것이 꿈속의 장면 같다 너를 직접 만나 이야기한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 돌아오면 우리 바다에 갈까? ― 여기가 물 반 얼음 반인데 무슨 바다야 우리는 이야기했다 식물원이나 미술관, 바닷가와 공원, 이미 가봤지만 다시 가보고 싶은 곳들에 대해, 다시 가서 다시 보고 ..
2022.04.27 -
황인찬 「노랑은 새로운 검정이다」
"연구 대상으로 삼은 텍스트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발제자가 덧붙일 때, 아무도 웃지 못했다 모두 그것이 발제문의 일부인 줄로만 알았으므로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검은 머리의 나라에서 태어나, 백발이 될 때까지 써나 간 누군가를 연구한다는 것은…… 열차는 서서히 선로를 벗어나고 있었다 차내의 사람들도 모두 검은 머리였고, 같은 나라의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번갈아 지나갔다 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지루해졌다 열차는 이미 선로를 벗어나 있었는데, 창에 비치는 것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남자 아이가 하나 그리고 또 다른 것이 있었..
2021.02.15 -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도서를 구입했을 때가 2017년. 인터넷으로 우연히 「무화과 숲」을 보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 선하다. 당시 다른 시인들의 시집을 읽곤 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게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분들께는 유감스럽다. 어찌 되었건 『구관조 씻기기』를 정독하고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이런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5년 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 '황인찬' 시인을 뒤늦게 안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오래도록 시를 읽어왔지만 그런 내게 지독할 정도의 자극과 열병을 준 시집이므로, 이 카테고리의 첫 번째 게시물로 선정한다. 평소 '시인의 말' 읽기를 무척 중요시하는데 『구관조 씻기기』에서는 목차 바로 앞에 위치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목차. 제목이 전체적으..
2021.01.02 -
황인찬 /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황인찬 /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었을 때,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소쇄원을 짓고 거기 은거하였다 소쇄원은 한국의 민간 정원 가운데 최고로 꼽히고 있다 (이상 소쇄원에서 핸드폰으로 소쇄원을 검색해본 결과) 아름다움 어렵네 정말 그렇네 오래된 건물이 서 있고 그 주변으로 작은 물이 흐르고 대나무 숲은 사시사철 푸르고 그런 것이 아름다움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아는 사람은 다 알아보겠지 소쇄원에 우리가 함께 갔다면 우리는 서로의 사진을 몇 장 찍고 함께 찍기도 했을 것이다 꽃과 나무 같은 것도 몇 장 찍었다면, 그때 우리는 남는 것은 사진뿐이야 그런 말을 주워섬기며 사진을 찍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
2020.12.24 -
황인찬 / 퇴적해안
황인찬 / 퇴적해안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어릴 적 보았던 새하얀 눈밭 살면서 가장 슬펐던 때는 아끼던 개가 떠나기 전 서로의 눈이 잠시 마주치던 순간 지루한 장마철, 장화를 처음 신고 웅덩이에 마음껏 발을 내딛던 날, 그때의 안심되는 흥분감이나 가족들과 함께 아무것도 아닌 농담에 서로 한참을 웃던 날을 무심코 떠올릴 때 혼자 짓는 미소 같은 것들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 것들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평범한 주말의 오후 거실 한구석에는 아끼던 개가 엎드려 자기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얘가 왜 여기 있어 그럼 지금까지 다 꿈이야? 그렇게 물었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개만 엎드려 있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린다 나는 개에게 밥..
2020.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