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 /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랑

2020. 3. 9. 13:42同僚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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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훈 /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랑

우리에겐 식탁도 밥상도 없었다

맨바닥에 와인 한 병, 술잔 하나

치즈의 포장지를 벗기는 너의 손에서 착착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무 웃기지 않니

그게 무슨 살림이라고

너는 복잡한 사랑은 싫다고 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니, 곧 기나긴 겨울이 올 텐데

미친 바람이 거리를 불고 갈 텐데

너는 냉장고 문을 열고 겨울을 먼저 보여주었지

거기 어제 먹다 남은 음식들

모든 식기에 랩이 씌워져 있었다

우리에게 씌워진 이 투명한 불투명

그러므로 솔직해지자

우리에게 식탁이나 밥상이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봄이 올 때까지 이 겨울의 사랑을 어찌 껴안을까

몸은 더운데 사랑의 바닥은 차갑구나

사랑아, 낙엽이 모두 떨어지기를 기다리자꾸나

그리고 기억하자

이 지난한 방 한 칸의 사랑을

 

 

 

정철훈 /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랑

(정철훈,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창비, 201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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