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늘 / 데칼코마니

2020. 5. 2. 01:59同僚愛/김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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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늘 / 데칼코마니

네가 낯설지 않아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좋아

내게서 너를 본떴거나

네게서 나를 훔쳐 왔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닮아 있어서,

너무 기쁜데,

이국적인 기분이 드는데,

너를 또는 나를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는 게 이렇게

어둡고 숨 막히는 반짝임이었나, 우리는

골몰해 볼 필요가 있어

입술이 겹쳐질 때마다 느껴,

이 관계가 나팔꽃처럼 시시해지지는 않을까

빗소리가 뜨겁게 바닥을 달굴 때

물고기의 호흡법으로 간신히 생을 견디는 너와

부피도 없이 밀도만으로 살아남은 나를,

굳이 둘로 쪼개지 않아도 됨을 깨닫고,

나를 위로하기 위해

너를 내 풍경에 구겨 넣고,

나날이 낯빛이 흐려가는 카나리아처럼

우리는 우울한 식사를 하지

“공기가 시들고 있어.”

“뭐가?”

“우리가 불가능하다는 신호야.”

함께일수록 서로를 칭할 말을 모르게 돼, 둘이어서 안되는 것이 불어날수록 깨끗한 환청이 매일 찾아와, 내 마음을 오려 교회에 숨겼지만 복사된 마음이 더욱 멀쩡히 살아 있고, 나부끼는 밤마다 너를 안았지만 차가운 네 빰이 말하고 있어

너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나의 끝,

나의 종말.

 

 

 

김하늘 / 데칼코마니

(김하늘, 샴토마토, 파란,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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