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29. 14:42ㆍ同僚愛
서대경 / 여우계단
여우계단
꿈에서 밝은 허공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잿빛의 높은 담벽들이 골목 양편으로 끝없이 뻗어나갑니다 하수구에서 올라온 검은 쥐들이 일렬로 벽 위를 기어갑니다 나는 담벽에 매달려 저편에 서 있는 못 보던 공장들과 못 보던 아버지들을 봅니다 공장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아버지는 목장갑을 벗고 철근 더미 위에 앉아 담배를 뭅니다 공장 앞으로 흑백의 강이 흘러갑니다 아버지 곁에 누워 있던 개들이 일제히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쪽을 향해 짖어댑니다 나는 조금 걸음을 빨리합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릴 적 동화에서 보았던 작은 여우가 보였습니다 여우는 계단 한쪽 구석에서 빙빙 맴을 돕니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서 여우는 은은히 빛납니다 속삭임이 퍼지고 여우의 율동이 밝은 빛의 여울을 이룹니다 어떻게 된 셈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저 은빛의 여울이 다음 꿈으로 가는 입구라는 걸 잘 압니다 꿈 밖에서는 아까부터 천장의 밧줄에 머리를 매단 채 어머니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나는 여울 속을 내려다봅니다 아까 보았던 밝은 허공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버지들이 저편에서 달려오고 있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들이 성기를 빳빳이 세운 아버지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옵니다 여우가 입으로 내 바짓가랑이를 당깁니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아버지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천천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여울 속으로 몸을 날립니다
아버지들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는 그 아이에 대해 할 말이 많지 않다 다만 내가 그 아이의 꿈의 입구를 봉했을 때 흘겨보던 잿빛 눈에 대해 기억한다 술에 취한 어느 날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이후로 눈가에 희뿌연 안개가 사라지지 않는다 욕설을 퍼붓고 매질을 해대도 아이는 아무 말이 없다 모든 게 이상해졌다 이 모든 게 아이놈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꿈들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또다른 꿈속에 있었다 알 수 없는 속삭임이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어느 날부턴가 마누라는 천장 위를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마누라는 삼 년 전에 죽었는데 아직도 천장 위를 걸어다닌다 자식놈은 잠만 잔다 제기랄, 언제부터 이놈의 개들이 내 주변을 어슬렁거렸을까 이렇게는 살 수 없다 나는 열심히 일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나는 아이놈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새로운 꿈의 입구가 열리고 아이는 잿빛 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입구를 닫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 나간다 오늘도 공장에 나갔지만 공장 문은 닫혀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들이 철근 더미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이는 꿈의 미로를 닫고 그러면 우리는 일한다 언제나 똑같다 우리는 일한다 빌어먹을 꿈의 입구가 다시 열릴 때까지
세번째 아이
아버지, 나는 여우를 따라왔어요 여긴 무척 밝고 추워요 아버지, 왜 자꾸만 내 침대 안으로 들어왔나요 아버지가 아버지들과 함께 내 방문을 부쉈을 때 나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골목을 달렸어요 아버지, 왜 내 안에는 열세 명의 아버지가 들어 있나요 아버지, 꿈은 내가 꾸는 게 아니잖아요 열세 명의 내가 꾸는 게 아니잖아요 꿈은 아버지가 꾸는 거잖아요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들과 어울려 내 바지를 내렸잖아요 아무리 꿈을 꿔도 아버지의 꿈속이었어요 아버지, 제발 어머니의 꿈속에서 나오세요 어머닌 삼 년 전에 죽었잖아요 아버지는 집에도 안 들어왔잖아요 우린 셋이에요 어제 또 하나의 내가 이곳에 왔어요 밝은 허공을 만나고 왔대요 여우를 따라왔대요 아버진 오늘도 공장에 나가겠죠 아버진 오늘도 또다른 날 쫓고 있겠죠 우린 곧 이곳에 모일 거예요 우린 곧, 열셋이 될 거예요
밝은 방
나는 내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여러 개의 꿈에서 하나의 꿈으로 건너왔다 나는 천장 위를 거닌다 바람이 킬킬거리며 창문을 흔들어댄다 천장 위로 달빛의 음영이 일렁인다 나는 이곳의 리듬이 마음에 든다 이곳은 밝고 춥다 나는 이렇게 완벽한 고요가 존재하는지 몰랐다 이곳에선 허공의 숨소리가 들린다 알맞게 어둡고 서늘한 속삭임이 내 열린 가슴속을 드나든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오는 이 존재의 굉음은 무엇일까 저 아이는 누굴까 누가 저 아이를 이 방 안에 눕혔을까 여기서는 모든 꿈이 잘 보인다 꿈의 입구를 여닫는 소리 아이가 뒤척이는 소리 몸을 구부리고 달빛에 잠기는 소리 침대 안의 미로들이 우글거리는 소리 이 비명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이는 누구를 기다리다 이렇게 잠이 든 걸까 그러나 나는…… 아이야, 삼 년 전에 네 아버지는 죽었단다…… 그러나 나는…… 그러나 나는…… 왜 아이는 깨어나지 않을까 왜 아이는 아까부터 가늘게 눈을 뜨고 있을까
서대경 / 여우계단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同僚愛'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철규 / 소행성 (1) | 2020.12.02 |
---|---|
오은 / 이국적 감정 (1) | 2020.12.02 |
이설야 / 은하카바레 (1) | 2020.11.16 |
이제니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1) | 2020.11.16 |
이제니 / 계피의 맛 (1) | 2020.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