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1. 13:11ㆍ同僚愛/주하림
주하림 / 반달 모양의 보지*
1
챙 넓은 모자 검은 모발
희고 커다란 코
입이 귀까지 찢어진 죽음을 보았네
2
경기도에 산다고 했다 넋 나간 목소리 혀 꼬인 발음이 어둠 속에서도 반듯한 나를 더듬더듬 짚어가는데 그러나 언니…… 미안해요 난 벌써 약에 취했어요 도나웨일 노래를 듣고 있어요 mi, ZBC, HYUNGIN25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게 수면제 그러니까 언니…… 대화라는 건 어렵지만 늘 내가 그린 그의 초상화를 가까이 두고 있어요 그가 왼쪽 눈을 감을 때 단숨에 스케치해나갔던, 너는 뭐 때문에 죽고 싶니 외로워 불쌍해? 실연이라 말하면 우리 합법적으로 만날 수 있나요? 같이 술을 마시고 포켓볼을 치며 쓸모없는 남자들을 꼬시며 언니……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사는 걸까
3
아니 여전히 있네 옆으로 나를 씨익 쳐다보며
검은 나비 떼를 부르고 혀 잘린 코브라를 부리지 나는
나뭇잎 그림자처럼 떨다 정말 나뭇잎 그림자답게 고요해졌다
수천개 나뭇잎 그림자처럼 복잡해졌다가
더는 기억을 새기지 않는 몸이 네가 벗어놓은 거웃과 삐딱하게
어울리네 우린 서로에게 줄 것이 추위와 고통밖에 없었을까
4
저녁 여덟시 이후에 전화 줘 언니가 뭐 하는 사람인지 진짜 언니인지 동생인지 죽고 싶은 사람인지 실은 뜻밖에 사랑해도 되는 사람인지 울기 전에, 살고 싶은 내 몸은 거짓말을 해버리고
주하림 / 반달 모양의 보지*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리고베르또 씨의 비밀노트』 중에서.
(주하림, 비버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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