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1. 13:31ㆍ同僚愛/주하림
주하림 / 병동일지 902
병원에 온 지 두달.
병원에 와서, 병원 오기 전 상황이 최악은 아니었다고
고백해본다 내가 태어난 곳은 똥물
종종 고향을 뒤집어쓰고 이방인들 대화를 엿듣는다
뒤집어쓴 똥물이 똥물이 될 때까지 가을풍이 여름풍이 될 때까지
우주가 산수가 될 때까지 추론이 귀납이 될 때까지 면회가 폭력으로 바뀔 때까지의 날들, 사는 것이 죽는 것으로 넘어갈 때
일부러 힘을 빼고 걷는다
밤마다 옆 병동 남자가 찾아와 숨죽이고 섹스한다
나의 물이 달아서 좋다는 남자; 진실에 이르는 계절들에게서 갈색빛이 난다 부디 그 슬픔 너라면 견딜 수 있었을까 '공백공백공백' 꽃들은 어둠 속에서 폭죽으로 펑펑 터지고 나는 눈 먼다 내가 사랑이어서 나는 사랑밖에 할 수 없었다 열병을 앓을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그러나 나는 이것을 전해주어야 해요 희고 빛나는 깃털―겨드랑이를 타고 줄줄줄 환각을 통과한다
환청에 매혹된 자; 비장한 얼굴로 꿈에 당도한 자.
혼잣말을 이해하기 위해 너무 많은 자유는 필요없다 내 절규는 얼마나 순진했던지 과정이 아니라 소유의 문제였어 영원을 꿈꾸지만 영원을 배반하고 지나가는 순간들 내가 무서워서 그랬어요
남자가 울어줄 때 나는 폭격 맞은 꽃밭: 엉망으로라도 가꿀 수 있다
감정과 감염의 한끗 차이 거울을 비출 때마다 초라해지는 것이고
'떠나려는 전차의 불빛' '가망 없는 말들' 노랗게 말라붙은 채로
주하림 / 병동일지 902
(주하림,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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