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강성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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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성탄전야」
자정 너머 TV 속의 성탄절 합창제를 보고 있었다 흑인남자의 구렁이 같은 입 안에서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거룩한 밤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멜로디는 아이의 입 속에서 굴러나온다 종이피아노는 한 번도 소리낸 적이 없다 아이는 피아노 건반을 입 속에 구겨넣는다 거룩한 밤 나는 TV 속으로 들어가 남자의 입을 틀어먹았다 내 입 속에서 부러진 건반들이 쏟아져나왔다 거룩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옆집 아이들과 산타할아버지가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거룩한 밤 거룩한 TV 속에 나 혼자 있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건반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거룩한 밤을 연주했다 사람들이 눈을 뭉쳐 TV 속으로 던졌다 나는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검고 하얀 뼈들을 하나씩 뽑아냈다 내 비명이 리듬을 타고..
2022.01.13 -
강성은 / Ghost
강성은 / Ghost나는 식판을 들고 앉을 자리를 찾는 아이였다식은 밥과 국을 들고 서 있다가점심시간이 끝났다문득 오리너구리는 어쩌다 오리너구리가 된 걸까오리도 너구리도 아닌데이런 생각을 하며긴 복도를 걸었다교실 문을 열자아무도 없고햇볕만 가득한 삼월 강성은 / Ghost(강성은, Lo-fi, 문학과지성사, 2018)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31 -
강성은 / 기일(忌日)
강성은 / 기일(忌日)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 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갔다 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창밖 가로등 아래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강성은 / 기일(忌日) (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 문학과지성사, 201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31 -
강성은 / 여름 한때
강성은 / 여름 한때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내 부모였다 나는 그것이 극 중이라는 걸 알았고 밝고 활기차 보이는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리다가 내 손톱에 찔려 화가 난 것을 보았다 극이 중단될까 두려워진 나는 사과하고 또 빌었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고 싶었지만 말 한마디 하는 것이 조심스러워 눈치만 보았다 그들과 나는 소풍을 갔는데 햇빛이 눈부셨는데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극 중이니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고 애써 웃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극은 계속 진행되었다 강성은 / 여름 한때 (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 문학과지성사, 201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18 -
강성은 / 나의 셔틀콕
강성은 / 나의 셔틀콕 아버지와 나는 배드민턴을 쳤다 셔틀콕은 도무지 공 같지 않고 깃털들은 얇은 종이처럼 하늘거리며 천천히 날았다 엄마는 의자에 앉아 우리를 보고 있었다 햇빛 때문에 찡그린 채로 손을 이마에 대고 지루한 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배드민턴 놀이는 셔틀콕의 비행은 슬로우모션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라켓을 높이 쳐든 아버지의 몸짓도 받으려는 나의 몸짓도 너무나 더디게 흘러갔다 나는 햇빛 사이로 비행하는 셔틀콕의 움직임을 반짝임을 시시각각 느끼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나는 초등학교 시절의 하얀 체육복을 입은 여자아이 공중에 한참 멈춰 있던 아버지의 라켓이 순식간에 내리치자 셔틀콕은 저편 숲 속으로 빠르게 휙 날아가버렸다 나는 촐랑거리는 강아지처럼 깡충껑충 뛰어..
2020.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