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황인찬(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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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 종로일가
황인찬 / 종로일가 새를 팔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새를 사람이 없었다 새는 떠나고 나는 남았다 물가에 발을 담그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다 종치는 소리가 들리면 새가 종에 부딪혔나 보다 하는 생각이 지워진다 할아버지, 하고 아이가 부르는데 날 부르는가 해서 돌아보았다 황인찬 / 종로일가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04 -
황인찬 / 한 해에는 천 마리 이상의 새가 창문에 부딪혀 죽는다
황인찬 / 한 해에는 천 마리 이상의 새가 창문에 부딪혀 죽는다 방금 새가 창문에 부딪혀 죽었다 간단한 평일의 오후에는 그런 일도 생긴다 초인종 소리가 들려 문을 열었다 문밖에 있는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제대로 된 것을 먹고 살아야지 어머니는 닭볶음탕을 건네주셨다 이것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차려 주신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앞으로는 교회에 좀 나오라고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파리냉채는 시고 매워서 먹기가 불편하였다 어머니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가 또 한 마리 창문에 부딪혀 죽어 있었다 황인찬 / 한 해에는 천 마리 이상의 새가 창문에 부딪혀 죽는다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https://www.instagram.com/donk..
2020.05.07 -
황인찬 / 부곡
황인찬 / 부곡 폐업한 온천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어 물은 끊기고 불은 꺼지고 요괴들이 살 것 같은 곳이었어 센과 치히로에서 본 것처럼 너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다들 어디론가 멀리 가버렸어 풀이 허리까지 올라온 공원 아이들이 있었던 세상 세상은 이제 영원히 조용하고 텅 빈 것이다 앞으로는 이 고독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긴 터널을 지나 낡은 유원지를 빠져나오면 사람들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황인찬 / 부곡 (황인찬,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15 -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사랑을 위한 ..
2020.02.28 -
황인찬 / 무화과 숲
황인찬 / 무화과 숲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 무화과 숲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