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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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임 / 감기
이용임 / 감기 바다가 검게 탄 늑골을 휘며 울고 있다 물로 목을 헹구고 맨발에 모래를 묻히며 숲으로 걸어간다 한쪽 속눈썹이 젖은 소나무들이 검록색으로 기울어 있다 한 대 맞은 거니, 너도 가지마다 말갛게 앉은 바람의 발뒤꿈치를 만지자 핏줄을 따라 파랗게 도드라지는 신열의 뿌리 밤마다 벌떡 일어나 앉는 잠의 가슴골에 흥건한 식은땀 가릉가릉 가슴께에 끓는 파도가 하얗게 몰려오고 사라지고 발가락에 젖은 모래들이 오한에 떨고 입이 비뚤어진 소나무들이 씹다 버린 연애처럼 바닥을 쓴다 모서리마다 뒤척거리며 잠시 흰 등을 보이다 어두워지는 히늘 혹으로 불거져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쿨룩 감은 눈동자를 치며 날아간다 반 뼘 비린내가 마른 풍경을 왈칵 구겨 쥐는 밤 희끗희끗한 어둠을 내려다..
2020.08.18 -
고주희 / 저물녘의 일
고주희 / 저물녘의 일누워서 멀어지는 구름을 보았을 뿐인데눈물이 났다보이지 않는 파동이 긴 고해처럼 흘렀다제지기오름에서 솟구치던 맥박의 떨림가슴을 치고 때리는 나직한 소리바람에 의연한 나무와 필사적으로 흔들리는 나뭇잎들곳곳 마음인가 싶어 눈을 감았다감아도 흐르는 얼굴 위를초여름 감기처럼 잠시 멈출 수 있다면이제 정말 다 왔다며 손을 이끄는슬프고 다정한 예감 앞에아무것도 할 수 없어바람 소리 멀어지고나는 지친 새처럼 앓고 있다누군가 급히 길을 내려가고예고 없이 몰려오는 먹구름동공에 맺힌 서로의 폭풍을 마주하며이미 젖은 사람의 입술에내 모든 걸 걸었었다 고주희 / 저물녘의 일(고주희,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 파란, 2019)https://www.instagram.com/do..
2020.08.11 -
손택수 / 날씨 없는 날씨
손택수 / 날씨 없는 날씨 일기예보를 보고 내일의 의상을 결정한다 내 사회성의 구 할 역시 날씨로부터 온다 날씨가 없었다면 내 어눌한 관계들은 다 파국을 맞고 말았을 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묻는 말도 취침 전의 관심사도 틀림없는 날씨 이야기다 캘리포니아 해변에 사는 제자가 보내온 이메일도 날씨로부터 시작한다 날씨는 만국공통어, 나이가 들면서 대기의 흐름에 예민해진다 정작 하늘 한번 본 적이 없이 하루를 마감하면서도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몸과 맘도 함께 반응을 한다 일기예보를 빠짐없이 살피면서 나는 늙어가나 보다 감기 걱정을 하고 미세먼지 마스크를 준비하면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빗속을 빗줄기처럼 뛰어다니고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눈사람을 만들 줄 아는 아이들을 부러워..
2020.04.30 -
문보영 / 불면
문보영 / 불면 누워서 나는 내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내 옆의 새벽 2시는 회색 담요를 말고 먼저 잠들었다 이불 밖으로 살짝 나온 내 발이 다른 이의 발이었으면 좋겠다 애인은 내 죽음 앞에서도 참 건강했는데 나는 내 옆얼굴이 기대서 잠을 청한다 옆얼굴을 베고 잠을 잔다 꿈속에서도 수년에 걸쳐 감기에 걸렸지만 나는 여전히 내 발바닥 위에 서 있었다 발바닥을 꾹 누르며 그만큼의 바닥 위에서 가로등처럼 휘어지며 이불을 덮어도 집요하게 밝아 오는 아침이 있어서 잠이 오면 부탄가스를 흡입하듯 옆모습이 누군가의 옆모습을 빨아들이다가 여전히 누군가 죽었다 잘 깎아 놓은 사과처럼 정갈하게 문보영 / 불면 (문보영, 책기둥, 민음사, 2017) https://www.instagra..
2020.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