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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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내생의 폭력」
내 생의 폭력은 죽어도 끝나지 않는다 티베트 망명지에서 수용소를 탈출한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안에서 무엇이 가장 두려웠나요 그는 말했다 나를 고문한 사람을 미워할까 두려웠습니다 나아가 모든 중국인을 미워할까 두려웠습니다 마음속에서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마음이 남아서 마음을 죽이려다 차가운 손에 화상을 입는 사람을 보았다 고기를 구웠다 나는 고기를 좋아합니다 누군가 이것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나는 먹고 마시고 말한다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리가 퍼진다 미안하다는 말입니다 고기에는 귀가 없다 나는 망명지가 없었다 되찾아야 할 나라도 없었다 사는 연습은 어디서 할 수 있는가 내생의 폭력은 현생에 준비되어 있다 물과 공기가 있는 것처럼 신을 비난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
2021.03.15 -
주하림 「오로라 털모자」
내 기억은 온전치 못한 것이기에 편지를 써두어요 겨울을 보냈어요 드레스를 입은 환자가 들판을 달려 엊그제 오해 때문에 떠나보냈던 남자 뒤를 쫓기 위해 고무오리인형을 타고 암흑뿐인 호수를 건너 조금씩 더 슬퍼져 가는 정신병자처럼 입가에 사탕부스러기를 붙이고 그것들이 떨어질 때까지 겨울 떡갈나무에도 입술이 생기길 바랐어요 잘생긴 귀가 보이는 기다랗고 멋진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얼어붙은 땅 따위 걷어차고 침대 속에 오래 묻어 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글과 익은 열매와 멍든 과일주 와 한 가지로 흘러나오는 목소리, 거기에 흩어진 주근깨 같은 당신을 보았어요 피부를 뚫고 나온 흙투성이 발톱 쐐기풀 망태기를 뒤집어쓰고 죽음과 나누던 이야기를 창밖으로 다른 나라 말로 비명을 지르는 눈사람 북유럽 동화를 읽어 ..
2021.02.24 -
신미나 / 겨울 산
신미나 / 겨울 산 크게 울리는 징 속으로 몸 말고 들어가 귀 막고 싶다 신미나 / 겨울 산 (신미나, 싱고, 라고 불렀다, 창비, 2014)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21 -
김진완 / 푸른 귀
김진완 / 푸른 귀 주차장 시멘트 터진 틈새로 잡풀 돋았다 내 사는 변두리가 우주 배꼽이 되고 우주 한가운데 돋은 풀은 푸른 귀가 된다 귀를 잡고 들어 올리면 네 발을 얌전히 모으고 대롱대는 강아지를 가만히 떠올려 보자 풀포기 잡고 살살 힘주면 앙증맞은 행성하나 아프다고 낑낑댄다 김진완 / 푸른 귀 (김진완, 모른다, 실천문학사, 201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9 -
유계영 / 대관람차
유계영 / 대관람차 가방 속에 하나 이상의 거울을 넣어가지고 다녔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줄곧 웅크렸던 귀가 툭 풀어질 것 같다 귓불에 살점이 붙던 시간은 왜 기억나지 않을까 바람이 태어난다고 믿게 되는 장소 부드러운 거절을 위해 빼곡이 심어놓은 나무들 세상의 모든 미로는 인간의 귀를 참조했다 누구도 자신의 귀를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뭐라고? 미로 속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이 메아리와 같이 희미해지네 거울의 내부에는 가방의 내부가 있고 바람의 내부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매달린다는 것은 동심원의 가장 먼 주름으로 사는 것 막다른 벽이라 생각하세요 결국 빠져나갈 거라면 최대한 긴 과정을 출구 앞에 펼쳐놓을 것입니다 귓속에 이름이 쌓여 있을 것만 같다 누군가 내 이름을..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