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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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빛」
― 너는 아름답다는 말이 되게 쉽게 나오더라 ― 그게 나쁜 일인가 너는 화면을 보지 않은 채 대답을 한다 그쪽은 지금 봄이라고 했던 것 같다 창밖이라도 보고 있는 것이겠지 가득 핀 벚꽃이 바로 보이는 곳이라 했다 나는 실험동물이 새끼를 밴 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너는 그걸 듣고 아름답다고 했던 것이다 ― 뭘 보고 있는 건데 ― 아무것도 내 오른쪽으로는 남극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희거나 푸른 것만 가득해서 가끔은 이 모든 것이 꿈속의 장면 같다 너를 직접 만나 이야기한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 돌아오면 우리 바다에 갈까? ― 여기가 물 반 얼음 반인데 무슨 바다야 우리는 이야기했다 식물원이나 미술관, 바닷가와 공원, 이미 가봤지만 다시 가보고 싶은 곳들에 대해, 다시 가서 다시 보고 ..
2022.04.27 -
임승유 / 사실
임승유 / 사실 여기 영혼이 있어. 불쑥 그런 말을 해버렸다. 숙소를 떠난 지는 한참 되었다. 왜 그런 말을 하냐며 너는 울먹이고 여길 봐. 이렇게 빛나는 이게 영혼이 아니면 뭐겠니. 머릿속이 하얘지는데 이건 아니라며 너는 돌아가자고 한다. 마지막으로 누가 불을 끄고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일어난 일을 따라 걷기로 한다. 멀리 불빛이 보이는 장면은 옛날이야기에 종종 나온다 한번 가면 못 나오는 거다. 알고 있었다. 임승유 / 사실 (임승유,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2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2.29 -
양안다 / 장미성운
양안다 / 장미성운 우리가 빛과 빛 사이에 놓여 있을 때 이곳이 어디인지 잠시 잊고 그 사실이 불편하지 않다면 너는 종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 나는 부유하는 먼지를 바라보는데 우리의 일부가 끝없이 확산되는 시간 붉은 병이 깨지자 주변이 온통 꽃밭이었다 손목을 그으려고 했어, 그런 말을 쉽게 하게 되고 폭우 속에서 걷는 연인을 바라보며 그들의 대화를 상상해 보는 일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휩쓸리고 있다고 우리가 어둠 속에 놓여 있을 때 언젠가 들었던 예언을 떠올리며 서로를 미리 증오하고 너는 눈이 내린다고 말한다 나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는데 풍선을 삼키고 그냥 터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때도 날 보러 와 줄래? 춥고 어둡다며 네가..
2020.11.29 -
고주희 / 확장되는 백야
고주희 / 확장되는 백야 펑펑 울고 나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창밖에 없는 것들을 믿었다면 더 멀리 갈 수도 있었겠지 어떤 것은 오래됐고 어떤 것은 새것이었다 한쪽 눈을 감으면 다른 빛이 열리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낮과 밤이 구겨진 백지로 버려지는 아침 참았던 분노는 왜 아이가 어질러 놓은 방바닥에서 시작되는가 두 눈을 껌뻑이며 너는 왜 색연필을 뒤로 감추는가 색종이 조각을 줍는가 능숙하게 화를 받아 내고 비 맞은 개처럼 정물화처럼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가 반복되는 용서 앞에서 얼마나 더 무참해질 수 있는가 잠이 들면 나를 제외한 몸들이 밝아 오는 희고 깨끗한 자작나무로의 먼 길 고주희 / 확장되는 백야 (고주희,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 ..
2020.08.11 -
이성진 / 계절감
이성진 / 계절감 오래된 노래는 늘 나보다 젊고 꽃은 늘 시든다 나는 건물인가 계속 부서지고 밝은 빛보다 희미한 빛으로 눈이 기운다 몸은 평생 한번 죽는데 마음은 살면서 몇 번 죽는 것일까 방과후 교실에서 혼자 책상에 구멍을 뚫는 아이가 보인다 이성진 / 계절감 (이성진, 미래의 연인, 실천문학사,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