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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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문이당, 2016
2021.01.26 -
양안다 / 이명
양안다 / 이명 밤이 되면 속을 게워내고 두 발이 녹고 네가 보였다 너는 환하게 웃고 있다 '날 사랑하니?' 너의 입모양이 보이는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는 너의 존재를 확인하려 자꾸 내게 물었다 너의 입술이 흐려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한낮이었다 너는 사라지고 없는데 어디선가 너의 질문이 계속 들렸다 양안다 / 이명 (양안다,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민음사,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9 -
김행숙 / 다른 전망대
김행숙 / 다른 전망대 저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를 전망대라고 생각해봅시다. 다른 나뭇가지로 옮겨 앉은 까마귀를 다른 전망대라고 생각해봅시다. 당신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당신의 전망대가 무너졌다고 탄식하기로 합시다. 한 그루 나무가 뿌리째 뽑히면, 얼마나 많은 눈동자들이 한꺼번에 눈을 감았는지 온 세상이 다 캄캄해졌습니다. 숲이 불타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거대한 눈동자처럼 활활 타고 있습니다. 불이라면, 불의 군주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따라 서울의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불빛에 도취한 연인의 독백이 독재자의 것처럼 느껴져 나의 사랑이 무서워졌습니다. 김행숙 / 다른 전망대 (김행숙, 1914년, 현대문학,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05 -
최백규 / 열대야
최백규 / 열대야 사랑이 사랑도 아닐 때까지 사랑을 한다 네가 물들인 내 밤이 너무 많다 전국적으로 별일 없이 해거름이 옮아가고 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야경을 바라본다 내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행복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울겠지 지난 주말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외지의 동물원으로 소풍을 갔다 가만히 쓰러진 기린을 구경했다 최백규 / 열대야 (창작동인 뿔,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9.15 -
양안다 / Parachute
양안다 / Parachute 내가 옥상 문을 열었을 때 너는 난간에 서 있었고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볼 수 있을까? 세계의 반대편을." "어떻게?" "땅속 깊은 곳으로, 깊게 들어갈 수 있다면." 나는 뒤에서 너를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떨어지면 내가 펼쳐지려고 며칠 전에는 너에게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지 나는 너를 조율하거나 고칠 생각이 없다 가능하면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우리가 망가진 채로 서로를 연주하면 비명을 듣게 될까 그러나 나는 여전히 너의 뒤를 안고 있다 나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어쩌면 너는 고장 난 낙하산을 메고 땅속 깊이 박힐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꿈에서 우리는 추락하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그저 사랑한다고, 사..
2020.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