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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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84p」
받아놓은 일도 이번 주면 끝을 볼 것입니다 하루는 고열이 나고 이틀은 좋아졌다가 다음 날 다시 열이 오르는 것을 삼일열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젊어서 학질을 앓은 주인공을 통해 저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다행히 그는 서른 해 정도를 더 살다 갑니다 자작나무 꽃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암꽃은 하늘을 향해 피고 수꽃은 아래로 늘어진다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전부터 알고 있던 것입니다 늦은 해가 나자 약을 먹고 오래 잠들었던 당신이 창을 열었습니다 어제 입고 개어놓았던 옷을 힘껏 털었고 그 소리를 들은 저는 하고 있던 일을 덮었습니다 창밖으로 겨울을 보낸 새들이 날아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온몸으로 온몸으로 혼자의 시간을 다 견디고 나서야 겨우 함께 맞을 수 있는 날들이 새..
2021.07.15 -
최백규 「수목한계」
우리에게 사랑은 새를 기르는 일보다 어려웠다 꿈 바깥에서도 너는 늘 나무라 적고 발음한 후 정말 그것으로 자라는 듯했다 그런 너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나도 온전히 숲을 이루거나 그 아래 수목장 된 것 같았다 매일 꿈마다 너와 누워 있는 장례였다 시들지 않은 손들이 묵묵히 얼굴을 쓸어가고 있었다 부수다 만 유리온실처럼 여전히 살갗이 눈부시고 따사로웠다 돌아누운 등을 끌어안고서 아무 일도 아직은 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주었다 양안다, 최백규, 너는 나보다 먼저 꿈속으로 떠나고, 기린과숲, 2021
2021.07.09 -
김희준 /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김희준 /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나는 반인족 안데르센의 공간에서 태어난 거지 오빠는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컨테이너 박스를 잠그면 매일 같은 책을 집었다 모서리가 닳아 꼭 소가 새끼를 핥은 모양이었다 동화가 백지라는 걸 알았을 땐 목소리를 외운 뒤였다 내 머리칼을 혀로 넘겨주었다는 것도 내 하반신이 인간이라는 문장 너 알고 있으면서 그날의 구름을 오독했던 거야 동화가 달랐다 나는 오빠의 방식이 무서웠다 인어는 풍성한 머릿결이 아니라고 아가미로 숨을 쉬었기에 키스를 못한 거라고 그리하여 비극이라고 네가 하늘을 달린다 팽팽한 바람으로 구름은 구름이 숨쉬는 것의 지문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누워서 구름의 생김새에 대해 생각하다가 노을이 하혈하는 것을 보았다 오빠는 그 시간대 새..
2020.11.21 -
고주희 / 저물녘의 일
고주희 / 저물녘의 일누워서 멀어지는 구름을 보았을 뿐인데눈물이 났다보이지 않는 파동이 긴 고해처럼 흘렀다제지기오름에서 솟구치던 맥박의 떨림가슴을 치고 때리는 나직한 소리바람에 의연한 나무와 필사적으로 흔들리는 나뭇잎들곳곳 마음인가 싶어 눈을 감았다감아도 흐르는 얼굴 위를초여름 감기처럼 잠시 멈출 수 있다면이제 정말 다 왔다며 손을 이끄는슬프고 다정한 예감 앞에아무것도 할 수 없어바람 소리 멀어지고나는 지친 새처럼 앓고 있다누군가 급히 길을 내려가고예고 없이 몰려오는 먹구름동공에 맺힌 서로의 폭풍을 마주하며이미 젖은 사람의 입술에내 모든 걸 걸었었다 고주희 / 저물녘의 일(고주희,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 파란, 2019)https://www.instagram.com/do..
2020.08.11 -
황인찬 / 종로일가
황인찬 / 종로일가 새를 팔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새를 사람이 없었다 새는 떠나고 나는 남았다 물가에 발을 담그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다 종치는 소리가 들리면 새가 종에 부딪혔나 보다 하는 생각이 지워진다 할아버지, 하고 아이가 부르는데 날 부르는가 해서 돌아보았다 황인찬 / 종로일가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