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373)
-
김중일 「내 꿈은 불면이 휩쓸고 간 폐허」
뉴스속보가 거실 한쪽에서 왕왕거리고 저녁식사 중인 엄마는 다몽증 환자 꾸벅꾸벅 잠결에 내 잠까지 모두 먹어치운다 거대한 태풍 '불면'이 1899년 이후 니이가따현 쪽으로 하루에 일 센티미터씩 북상 중이다 북상 중인 달팽이…… 태풍의 이동경로를 따라 장거리주자인 나는 불면의 중심에 가건물로 세워진 재해대책본부가 있는 결승점을 향해 오늘 밤도 달리는 중이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 이봐, 힘들게 너는 왜 하필 지금 잠을 청하려 하지? 오늘 밤엔 재밌는 일도 많은데 나는 적요한 불면의 눈을 향해 줄곧 달리는 중이다 나는 돌풍이 휘몰아치는 불면 속에서 팥죽 같은 잠을 뚝뚝 흘린다 길가의 창문을 티슈처럼 뽑아 모공 속에서 줄줄이 기어나오는 잠을 닦는다 작고 끈적하고 더운 뱀…… 순간 지진으로 땅이 길게 ..
2021.07.15 -
김중일 「불면의 스케치」
늙은 고양이 한마리가 아름답게 무뎌진 발톱으로 분리수거된 비닐을 뜯자 구름과 모래가 뒤섞인 저녁이 툭 터져나왔다. 오래 자란 수염을 태운 혹독한 냄새를 풍기며. 오랜 정전 속에서 매일 우리는 함게 모여 촛불을 불었다. 훅 태양이 한쪽으로 길고 까맣게 누운 사이, 우리집에는 검은 모자를 뒤집어쓴 이방인처럼 어젯밤이 찾아와 뜬눈으로 묵어갔다. 꺼진 줄 알았던 촛불은 되살아났다. 촛불과 촛불 사이에 놓인 침대 입술과 입술 사이로 빼문 허연 혀처럼 흘러나와 있는 단 한 조각의 미명 수북한 음모는 우리를 길 위에 그려넣던 그가 너무나 지루해서 연필을 쥔 채 깜빡 졸았던 흔적 창문이라는 맨홀 속으로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우리는 산산이 부서져 서로 뒤섞이며 떨어진다. 지붕 위로 촛농처럼 비가 떨..
2021.07.15 -
조해주 「시먼딩」
눈앞을 지나가는 빛의 무리는 정말 오토바이일까 한 대의 오토바이가 푸르게 쌓아놓은 석과 더미를 무너뜨린다 천막 아래서 졸던 과일가게 주인이 놀라서 얼른 뛰어나오고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덩어리들을 주워 담기 시작한다 이거 먹을 수 있는 건가 생각하면서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과육 석과에서 나온 하얀 속이 여기저기 덮인 바닥 눈앞을 지나가는 것이 정말은 무엇인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마는 그것을 멈춰 세우는 순간 사람 머리 따위는 한 번에 날아가버리겠구나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젖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부서진 석과는 부서지지 않은 석과와 함께 봉투에 가득 담겨있다 주인은 다시 자리에 앉아 부채질을 한다 부채가 몇 개인지 알 수 없도록 2021 시마당 봄호
2021.07.10 -
최백규 「수목한계」
우리에게 사랑은 새를 기르는 일보다 어려웠다 꿈 바깥에서도 너는 늘 나무라 적고 발음한 후 정말 그것으로 자라는 듯했다 그런 너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나도 온전히 숲을 이루거나 그 아래 수목장 된 것 같았다 매일 꿈마다 너와 누워 있는 장례였다 시들지 않은 손들이 묵묵히 얼굴을 쓸어가고 있었다 부수다 만 유리온실처럼 여전히 살갗이 눈부시고 따사로웠다 돌아누운 등을 끌어안고서 아무 일도 아직은 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주었다 양안다, 최백규, 너는 나보다 먼저 꿈속으로 떠나고, 기린과숲, 2021
2021.07.09 -
이현호 「뜰힘」
새를 날게 하는 건 날개의 몸일까 새라는 이름일까 구름을 띄우는 게 구름이라는 이름의 부력이라면 나는 입술이 닳도록 네 이름을 하늘에 풀어놓겠지 여기서 가장 먼 별의 이름을 잠든 너의 귓속에 속삭이겠지 나는 너의 비행기 네 꿈속의 양떼구름 입술이 닳기 전에 입맞춤해줄래? 너의 입술일까 너라는 이름일까 잠자리채를 메고 밤하늘을 열기구처럼 솟아오르는 나에 대해 이현호, 라이터 좀 빌립시다, 문학동네, 2014
2021.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