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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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특별한 일」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를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시요일, 내일 아침에는 정말 괜찮을 거예요, 미디어창비, 2021
2021.07.05 -
안희연 「소동」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
2021.06.29 -
윤지양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 오랜만에 걱정이 어른스럽게 말했다 너 문단에 아는 사람도 없어서 어떡하니 그러게 쓰고 싶은 대로 쓸 거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말해도 들을 사람도 없고 사랑하는 것만 쓸 수도 없고 미워하는 것만 버릴 수도 없네 무엇을 담으면 넘치지 않을까 세수를 했다 양치도 하고 밥도 먹고 친구도 만나고 무엇을 담으면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글쎄 고아도 자라면 어른이 된다니까 윤지양, 스키드, 문학과지성사, 2021
2021.06.28 -
서윤후 「피오르드의 연인」
아름다운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어려웠다 개와 물푸레나무 울타리와 트랙터 발작과 키스…… 하염없는 것들의 견고한 사랑으로 이루어졌으니 종종 당신의 예외가 되고 싶었던 모양 고전 속 은유들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내일이 무표정으로 찾아오는 것은 당신의 단골손님처럼 살아간다는 것 불 끄면 푸줏간은 이토록 무서운 곳인데, 물컹 꼬리를 밟고 우는 것도 정작 나뿐인 곳에서 위험한 쪽을 내다보지 않는 우리의 아늑함을 애태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서재에서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다 내가 숨길 것이 더 많아지는 일처럼 당신을 사랑한 이들이 두고 간 수많은 편지는 미응답 속에서 각자 품어온 열매를 베어 물게 했다 나는 나만 겨우 매달 수 있는 텅 빈 나무를 기르느..
2021.06.18 -
서윤후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티브이에 춤추고 노래하는 내가 나온다 생선을 바르다 말고 본다 이 무대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할 댄스 가수 얼굴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술 취한 자들의 노래만큼 엉망이었지 흥얼거리다 사라질 이름인데 너무 오래 쓴 거야 도려주긴 그렇고 버리는 것이지 나도 잃어버린 것을 주워다 썼으니까 코러스 없이는 노래를 못해요 무반주는 아주 곤란해요 악보 볼 줄 몰라요 춤은 자신 있어 함성 질러주면 노래 열심히 안 해도 될 텐데 무거운 가발을 벗으면서 묻기를, 시작하는 게 두려워? 끝내는 건? 남겨진 질문에 흔들리는 귀걸이의 큐빅으로 대신 말한다 잘 모르겠어 모르는 게 많아 신비로울 줄 알았던 텅 빈 해골에 사람들은 찬사를 보내고 내장까지 꽉 찬 헛기침으로 구름을 걷고 내가 누군가의 기분이 될 수 있으리라 당신..
2021.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