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5)
-
이규리 「특별한 일」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를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시요일, 내일 아침에는 정말 괜찮을 거예요, 미디어창비, 2021
2021.07.05 -
이수명 「물류창고」
어두워서 잠이 오지 않아 나도 잠이 오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는 눈을 감을 수가 없어 어둠이 보고 있을 때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잠은 엉터리여서 자고 있을 때는 어디를 다쳤는지 알 수가 없어 와인이 도움이 될 거야 잔을 부딪치는 것이 도움이 될 거야 나도 돕는다 같이 마신다 오늘은 머리를 서쪽으로 하고 누웠지 잠은 잘 있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몸이 줄어들어 자고 나면 몸이 다 사라질 거야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거야 이미 깨어 있어서 언제나 깨어 있어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해 아무도 나를 깨우지 못해 나도 그를 깨우고 싶지 않다 이윽고 환해서 아주 많이 환해져서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틀려버릴 거야 그러나 아침이 오면 나는 아직 눈을 뜨고 있는 것 같다 이수명, 물류창고,..
2021.01.16 -
김행숙 / 이별여행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지만
김행숙 / 이별여행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어젯밤 나는 마지막 기차를 타고 떠났네. 마지막 기차를 타고 네 시간을 달려 새벽이라고 부르는 시간에 도착했어. 나는 새벽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네. 안녕, 새벽. 바닷가 마을도 아닌데 멀리서 파도 소리가…… 민박집 주인이 손전등을 준비해 오라고 했어. 오는 길에 가로등이 없답니다. 양배추밭 사잇길로 어둠을 쏘아보며 씩씩하게 걸어오세요. 검은 고양이 같은 어둠에 대해 나는 아는 게 별로 없는데…… 손전등으로 어둠을 비추니 내가 들킨 것처럼 으스스했어. 아, 안녕 어둠. 바닷가 마을도 아닌데 파도 소리가 멀어졌다 멀어졌다 가까워지네…… 왜 내게 인사도 하지 않는 거니? 네가 말했지. 글쎄, 나는 마음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 그..
2020.11.05 -
김은경 / 비의 교훈
김은경 / 비의 교훈 한여름 폭우 같은 봄비 쏟아지다 밤을 이어 내리던 빗줄기는 아침이 와도 잦아들지 않고 이번 생의 교훈이라면 다섯 번의 연애를 하는 사람은 다섯 번의 생을 살고 아흔아홉 번의 이별을 하는 사람은 아흔아홉 번의 생을 산다는 것 마흔 살의 나는 벌써 백발 할머니가 된 기분이야, 그런 독백이나 중얼거리며 비 맞고 서 있다 읍내 목욕탕서 종일 뒹굴다 온 날처럼 열 손가락이 쪼글쪼글하다 김은경 / 비의 교훈 (김은경,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 실천문학사,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9.02 -
이덕규 / 이제 막 눈이 녹으려 할 때
이덕규 / 이제 막 눈이 녹으려 할 때 무장무장 때로 몰려 내려오는 함박눈 송이송이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작정하고 뛰어내려서 한빛이다 아니다, 수많은 눈송이들 하나하나가 다 다른 생각으로 뛰어내려서 한빛이다 분분이 한빛이다 밤 새 내린 고만고만한 생각들이 서로 어깨 팔 다리 걸고 부둥켜안은 채 골똘한 아침, 생각해보니, 딱히 살자고 내려온 건 아니었다 이덕규 / 이제 막 눈이 녹으려 할 때 (시와환상, 편집부, 이레웍스, 201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