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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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계절」
사거리에 서 있다가 사람이 사람을 실수로 죽이는 것을 보았다 피가 흘렀지만 구름과 바람이 같이 흘러 화창해졌다 신호등은 정해진 색깔로 점멸하고 있었다 눈물을 삼키다 가라앉는 사람도 보았다 은하수는 하늘에 떠 있다 밤하늘에도 물이 가득하다 이름을 부를 때면 입에 간격이 생긴다 선분 같은 걸 공책에 그리고 있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네 번째 이름을 스스로 지어 보면서 그 물을 다 보고서도 우리는 물을 마시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넷이 모여 하나가 된다니 이상합니다 집이라는 것이 생길 것 같다 공포에 질린 바둑알처럼 사람들은 희거나 검은 얼굴을 하고 있다 안전하다고 합니다 넘치는 것이 있습니까 안전하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문을 걸어 잠근다 계절의 담장을 주인 없는 고양이가 걸어서 통과한다 어..
2021.03.15 -
김경주 / 기담(奇談)
김경주 / 기담(奇談) 지도를 태운다 묻혀 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 있다 그 잠을 이식한 화술은 내 무덤이 될까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人形)을 본다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 인간에겐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 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 김경주 / 기담(奇談) (김경주, 기담, 문학과지성사, 200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9 -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손끝마다 안개를 심어둔 저녁에는 익사한 사람의 발을 만지는 심정으로 창을 열었다 젖은 솜으로 기운 외투를 덮고 잠드는 나날이었다 몸 안의 물기를 모두 공중으로 흩뿌리고서야 닿을 수 있는 탁한 피의 거처가 있다 내 속을 헤엄치던 이는 순간의 바다로 흘러갔다 젖어들고 나서야 문장의 끝이 만져지는 기이한 세계 굳어버린 혀에 안개가 서리면 입속은 수레국화를 머금은 듯 자욱해진다 어깨를 털어내는 새의 깃털 속에서 계절은 문득 오랜 미신이 되었다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8 -
서대경 / 흡혈귀
서대경 / 흡혈귀 흑백의 나무가 얼어붙은 길 사이로 펄럭인다 박쥐 같은 기억이 허공을 난다 모조리 다 헤맨 기억이 박쥐로 태어났다 나는 인간의 피를 먹지 않는다 내가 두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면 박쥐가 내 어깨에 내려앉기 까지 한다 서대경 / 흡혈귀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27 -
박준 / 파주
박준 / 파주 살아 있을 때 피를 빼지 않은 민어의 살은 붉다 살아생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 아버지가 혼자 살던 파주 집, 어느 겨울날 연락도 없이 그 집을 찾아가면 얼굴이 붉은 아버지가 목울대를 씰룩여가머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박준 / 파주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