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 / 미래의 연인 ― 끝의 무성영화

2020. 8. 6. 17:54同僚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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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 미래의 연인 ― 끝의 무성영화

1

네가 내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시간

머리카락도 처음엔 길이었을 것이다

2

똑같은 구름이 평생 너를 따라 다녔다 그게 심심해서

금요일과

저녁의 경계선과

옥상에서 부는 바람과

봉지 안에 담긴 캔맥주와 우린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너와 계절을 나눠 쓰던 밤과 방과 바깥들

양치질을 하며 마주 보고 선 우린

서로의 얼굴을 베끼며 웃곤 했다

손톱들이 말하지 않고 조는 모양으로

서로의 등으로 스며들면 나오던 너의 취미들

그런 날들의 문 밖은 대체로 하얀 태양처럼 선선했다

3

야간열차가 좀 더 어두워지기 위해

달리는 밤과 많이 추운 등

마지막 인사는 서로 인사하지 않는 게 인사하는 거지

너의 목소리에서 겨울이 새는 소리가 났다

코에서 피를 흘리며 다른 색으로 돌아앉고

나는 가루약처럼 조금씩 나눠서 울었다

우리의 감정들이 이 세계에서 하나의 전기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안심하고 쓰는 반성문처럼 숨을 몰아쉬며

굳어가는 너의 색깔을 내 동공 안으로 쓸어 담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등 뒤에서

내 것이었던 너의 손을 바라보았다 곧

껌종이에 싸놓은 면도칼을 꺼내 내 손목이 깨물게 하고

고개를 들어 검은 바탕의 하얀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에서 더운 비가 내리고 나도 점점 더워지고

우린 같은 색깔로 간이역 바닥에 흘러

코스모스 안으로 얇게 스며들었다

금요일들을, 저녁의 경계선을, 옥상에서 부는 바람을, 봉지 안에 담긴 캔맥주를

풍경에 걸어두고

4

나는 머리카락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잘 깨진 구름이었다

 

 

 

이성진 / 미래의 연인 ― 끝의 무성영화

(이성진, 미래의 연인, 실천문학사,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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