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 / 분홍 주의보
2020. 11. 29. 11:42ㆍ同僚愛/김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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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 분홍 주의보
자다가 깨어나 몸에서 악취가 나는 것 같아
자주 찬물에 샤워를 한다
침팬지가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웃고 있는 것은
공포를 표현하는 것이라는데
술자리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늘 그 말이 생각난다
그런 날 나는 너무 자주 웃었거나
화장실에서 오줌 누고 돌아온 후
방금 자지를 주물럭거렸던 손으로
여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꼬락서니다
마침내 복서의 입에서 마우스피스가 툭 떨어진다
하―
그보다 마일드한 담배.
끝까지 가보지 않아도 좋았을
지루한 12라운드를 다 지켜본 기분이랄까
심판이 승자의 팔을 번쩍 들어 올려주지 않고 다가가서 선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자넨 자네 삶과 밀월을 즐기는 것 같군그래."
챔피언이 그를 보며 침팬지처럼 헐떡거려준다
그런 그로테스크한 직무 유기가 있나
관중들의 유미주의가 술잔을 내던졌다
저녁에 찾아오는 술자리
루브르 박물관이 있는 자리는 원래 늑대 사냥터였다고 하는데
독수리가 이유 없이 양봉을 습격했다는 다큐가 자꾸 떠오른다
김경주 / 분홍 주의보
(김경주, 기담, 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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