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이민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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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모조 숲」
날씨는 뒤에서 다가왔고 우리는 걸으면서도 목을 자꾸 돌렸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털을 키웠다. 꼬리뼈에 나무를 심은 녀석도 있다. 빌딩들 사이에 강물이 있고 버려진 숲이 있다. 날개가 걷힌 새의 얼굴과 구름의 건축. 밤과 낮에는 색깔이 다른 공기가 필요하다. 고양이가 필요하다. 당신과 내가 반반씩 필요하다. 검은고양이소셜클럽. 표정이 없는 당신과 말이 없는 내가 수염처럼 멤버가 된다. 아침마다 새로운 음악이 분다. 물결치듯 드럼을 치는 호흡과 바람의 애드리브. 눈을 감고 빗줄기를 튕기는 어둠은 우리의 선생. 그는 텐트를 치고 나는 기타를 치고. 눈을 감으려면 부릅뜨는 연습을 하세요. 사라지세요. 줄을 서세요. 줄을 서서 우리는 눈을 맞췄다. 연주를 모르는 당신과 악보를 모르는 내가 거울처럼 주고받는 ..
2022.01.13 -
이민하 「비어 있는 사람」
창살만 남은 늑골 사이로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금은 저녁일까 아침일까 십 년 만에 눈을 뜬 것만 같아 끄고 잠든 별빛처럼 지붕도 함께 사라진 것일까 이대로 일어날 수 없다면 의사들이 달려올까 용역들이 달려올까 밤에 지나는 사람은 플래시를 들고 오고 용감한 휘파람으로 제 몸을 끌고 오고 담력 테스트를 하려고 사람들이 몰려올지도 몰라 죽어 버린 장소는 죽은 사람보다 무섭고 벽이 헐리기 전까지 깃드는 건 소문과 어둠뿐인지도 몰라 숨어 있기 좋아서 고양이들은 움푹한 옆구리로 파고들고 헐거운 뱃가죽에 눌러앉았다 뼈가 닳고 있는데 모래가 날린다 모래는 어느 구석에 또 쌓여서 불빛을 부르고 휘파람을 부르고 우리가 다시 사랑을 한다면 태양보다 뜨거운 검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사랑을 한다면 어..
2021.07.29 -
이민하 「누드비치」
누드비치라는 말은 기분이 좋다 먼 나라 사람 이름 같다 귀르비치 말코비치 이바노비치 나랑은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달리는 말 위의 소나기 같고 골목 끝 신혼집에서 불어오는 콧노래 같고 그곳에선 밤이면 까르르 한 쌍의 깃털베개도 날아다닌다 말을 달려도 말을 멈춰도 소나기는 내린다 베개 솔기가 터지도록 찢어지게 웃다가 찢어지는 연인과 찢어지게 가난해서 찢어지는 가족과 찢어지게 낡아서 찢어지는 책들과 속수무책이 쌓여서 읽을 수 없는 날이 오고 창 밖의 창 밖의 창 밖의 별을 더듬으며 과거를 알고 싶어요? 나체로 말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질까 그런데 왜 양말은 신고 있죠? 그것이 이름표라는 듯이 아직 벗을 게 더 남았다는 듯이 국경을 벗으면 세계는 하나라는 듯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얼기설..
2021.06.06 -
이민하 「가위」
어떤 날에 우리는 철없이 병이 깊었다 일요일인데 얘들아, 어디 가니? 머리에 불이 나요 불볕이 튀는데 없는 약국을 헤매고 창가에는 화분이 늘었다 좋은 기억을 기르자꾸나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고 눈 코 입이 만개할 때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생크림을 발라줄게 촛불을 끄렴 나쁜 기억의 수만큼 전쟁을 줄입시다 담배를 줄이듯 징집되는 소녀들은 머리에 가득 초를 꽂고 꿈자리에 숨어도 매일 끌려가는데 우리의 무기는 핸드메이드 페이퍼에 혼잣말을 말아 피우는 저녁 사는 게 장난 아닌데 끊을 수 있나 몸값 대신 오르는 건 혈압뿐이구나 위층의 아이들은 어둠을 모르고 군악대처럼 삑삑거리는 리코더 소리 이놈의 쥐새끼들 같으니! 막대기로 두드려봤자 천장이 문도 아닌데 입구가 없으면 출구도 없을 텐..
2021.06.06 -
이민하 / 가족사진
이민하 / 가족사진 엄마는 밤새 빨래를 하고 할머니는 빨래를 널고 아버지는 빨래를 걷고 나는 옷들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교복 날이 새도록 세탁기가 돌아도 벽에 고인 빗물은 탈수되지 않고 멍이 든 두 귀를 검은 유리창에 쿵쿵 박으며 나는 계절의 구구단을 외고 동생은 세 살배기 아들과 기억의 퍼즐을 맞추고 할머니는 그만해라 그만해라 욕실을 들여다보시고 엄마는 죽어서도 빨래를 하고 팔다리가 엉킨 우리들은 마르지도 않는 지하 빨랫줄에 널려 아버지는 나를 걷고 나는 동생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아버지 이민하 / 가족사진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201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