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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효 「앙드레 브르통의 말」
아침에 벨이 울려 복도가 깬다고 할 수 있을까 이별의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그림자를 밟았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장밋빛 비누 받침, 수평적이고 안전한, 그러므로 스페인 소년이 등장할 것 같고, 문을 두드리며 입속에 맴도는 말을 뱉다가, 리볼버 총탄이 떡갈나무에 구멍을 낼 것 같고 경찰이 와도 멈추지 마, 나는 중얼거리며 스페인 소년의 정지된 입술을 한참동안 지켜본다 해가 지는 방, 뜨거운 사과, 오븐 속에 넣어둔 비명, 마을 사람들이 안뜰에다 올가미를 설치해놓는 이미지, 그런 의혹이 부풀어 올라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스페인 소년의 걸음은 내 앞을 지나치기 때문에, 나는 낮잠에 빠져들어야 한다 가령, 소파 팔걸이를 짚고 잠에 드는 모습, 커튼 뒤로 숨은 소년의 발가락을 밟고 모른 체 하는 불친절함, 자동차 경..
2022.01.14 -
이민하 「모조 숲」
날씨는 뒤에서 다가왔고 우리는 걸으면서도 목을 자꾸 돌렸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털을 키웠다. 꼬리뼈에 나무를 심은 녀석도 있다. 빌딩들 사이에 강물이 있고 버려진 숲이 있다. 날개가 걷힌 새의 얼굴과 구름의 건축. 밤과 낮에는 색깔이 다른 공기가 필요하다. 고양이가 필요하다. 당신과 내가 반반씩 필요하다. 검은고양이소셜클럽. 표정이 없는 당신과 말이 없는 내가 수염처럼 멤버가 된다. 아침마다 새로운 음악이 분다. 물결치듯 드럼을 치는 호흡과 바람의 애드리브. 눈을 감고 빗줄기를 튕기는 어둠은 우리의 선생. 그는 텐트를 치고 나는 기타를 치고. 눈을 감으려면 부릅뜨는 연습을 하세요. 사라지세요. 줄을 서세요. 줄을 서서 우리는 눈을 맞췄다. 연주를 모르는 당신과 악보를 모르는 내가 거울처럼 주고받는 ..
2022.01.13 -
이기리 「꽃과 생명」
은은한 불빛의 회복실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비로소 반지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호사는 마취가 풀리려면 세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절대 자세를 바꾸지 말고 그대로 누워 있으라고 했다 회색 커튼 너머로 어느 한 노인이 마른기침을 하며 오줌통에 소변을 보고 있었고 적당한 무기력은 몸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퇴원하는 날 새로운 반지를 하나 살 거라고 말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주사도 빼 드릴게요 같은 말들이 일상적으로 들렸고 너는 이곳의 벽이 흰색이 아니라 하늘색이어서 좋다고 했다 그런 건 참을 수 있었다 바지에 묻은 소고기뭇국을 스스로 닦을 수도 없을 때마다 밀려오는 아침 속에서 항생제가 한 방울씩 낙석처럼 떨어질 때마다 주먹을 쥐어 보기도 하고 옷을 벗어 봉합된 자국을 ..
2022.01.13 -
강성은 「성탄전야」
자정 너머 TV 속의 성탄절 합창제를 보고 있었다 흑인남자의 구렁이 같은 입 안에서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거룩한 밤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멜로디는 아이의 입 속에서 굴러나온다 종이피아노는 한 번도 소리낸 적이 없다 아이는 피아노 건반을 입 속에 구겨넣는다 거룩한 밤 나는 TV 속으로 들어가 남자의 입을 틀어먹았다 내 입 속에서 부러진 건반들이 쏟아져나왔다 거룩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옆집 아이들과 산타할아버지가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거룩한 밤 거룩한 TV 속에 나 혼자 있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건반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거룩한 밤을 연주했다 사람들이 눈을 뭉쳐 TV 속으로 던졌다 나는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검고 하얀 뼈들을 하나씩 뽑아냈다 내 비명이 리듬을 타고..
2022.01.13 -
정다연 「월화수목금토일」
잘 지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잘 지내 답하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오늘은 당신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음식을 올려놓고 기름기 묻은 손을 세제로 씻으며 물기를 닦던 사소한 습관과 벨을 누르면 가장 먼저 반겨주던 당신에 대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음성에 대해 - 잘 지내고 있어? 벽장에 비치는 것이라곤 그림자 하나뿐인데 문득 묻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비를 모으고 모으다 못 견디고 무너지는 댐처럼 폭설에 쓰러지는 나무처럼 어떻게 지내 묻고 싶은 순간이 - 오늘은 당신에 대해 이야기를 참 많이 나누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던 음식을 앞에 두고 왜 싫어했을까? 이렇게 먹기 좋은 것을 웃으면서 월화수목금토..
2021.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