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7)
-
박민혁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액상의 꿈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매달고, 생시 문턱을 넘는다. 애인의 악몽을 대신 꿔 준 날은 전화기를 꺼 둔 채 골목을 배회했다. 그럴 때마다 배경음악처럼 누군가는 건반을 두드린다. 비로소 몇 마디를 얻기 위해 침묵을 연습할 것. 총명한 성기는 매번 산책을 방해한다. 도착적 슬픔이 엄습한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부모에게서, 향정신성 문장 몇 개를 훔쳤다. 아름다웠다.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경외한다. 우리들의 객쩍음에.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유 없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나의 지랄은 세련된 것. 병법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 너는 나의 편견이다. 불안과의 잠자리에서는 더 이상 피임하지 않는다. 내가 돌아볼 때마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비극을 연기한..
2021.03.25 -
사윤수 「폭설」
높은 궁지에서 분분히 하강하는 피난 눈이 내린다 오랜 나날 동안 그 앞을 지나다녔으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떤 골목의 입구 시든 꽃나무 흙덩이를 안은 채 깨어진 화분들과 창백하게 뒹구는 연탄재 위에도 눈이 쌓인다 여기는 어디선가 본 멸망의 나라 사람들 모두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가고 건너편 횟집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만 화석처럼 뻐끔뻐끔 이곳을 바라본다 두껍게 얼어붙는 시간의 계곡이 전 생애의 날개를 저어 떠나버린 것들의 뒷모습을 닮았다 하얀 침묵이 소리 없이 지상의 발목까지 내려 쌓이는 동안 그 골목으로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다 폭설이 서서히 골목의 입구를 닫고 있었다 사윤수, 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 시인동네, 2019
2021.01.07 -
유이우 / 부드러운 거리
유이우 / 부드러운 거리 미소짓는 마음만 둥근 거라던 사랑하는 골목이 강박을 약간 치우면서 원하는 그 느낌으로 살기 위하여 되돌아 와서는 얼마간의 새로운 세계들을 계속 등 뒤로 보내는 거야 유이우 / 부드러운 거리 (편집부, 시마당 봄호, 시마당, 202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2.27 -
최영랑 / 카페인
최영랑 / 카페인 활성도가 높은 밤 내 머리를 떠난 생각들이 백야 속에 서성인다 엉킨 머리칼처럼 와글와글거린다 장막을 열어젖히고 배고픈 골목이 어둠을 할퀴며 걸어온다 그 순간 팜므파탈은 시작된다 한참동안 나는 그 골목에서 출출해진 허공의 귓속말을 깨문다 내안의 발톱들이 자리를 옮겨 다니며 생각의 반경을 넓힌다 어떤 뒷모습에선 낯선 남자의 끈적이는 등과 허리가 무너지기도 한다 눈을 감아도 도발적인 어둠은 어디론가 밀려가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잔재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곧 탄성을 얻을 것처럼 탱탱해질 것이다 통증처럼 백야는 아가리를 벌린다 노골적인 생각이 흩어진 감각들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몸속 가등 팽창되는 중력 발끝마다 서성이는 얼룩의 세계 프릴의 주름처럼 난해해..
2020.09.23 -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요 며칠 인적 드문 날들 계속되었습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한없이 맑고 찬 갈림길이 이리저리 파여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걷다가 지치면 문득 서서 당신의 침묵을 듣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남긴 유일한 흔적입니다 병을 앓고 난 뒤의 무한한 시야, 이마가 마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이 깊이 파인 두 눈을 들면 허공으로 한줄기 비행운(飛行雲)이 그어져갑니다 사방으로 바람이 걸어옵니다 아아 당신, 길들이 저마다 아득한 얼음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