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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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비어 있는 사람」
창살만 남은 늑골 사이로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금은 저녁일까 아침일까 십 년 만에 눈을 뜬 것만 같아 끄고 잠든 별빛처럼 지붕도 함께 사라진 것일까 이대로 일어날 수 없다면 의사들이 달려올까 용역들이 달려올까 밤에 지나는 사람은 플래시를 들고 오고 용감한 휘파람으로 제 몸을 끌고 오고 담력 테스트를 하려고 사람들이 몰려올지도 몰라 죽어 버린 장소는 죽은 사람보다 무섭고 벽이 헐리기 전까지 깃드는 건 소문과 어둠뿐인지도 몰라 숨어 있기 좋아서 고양이들은 움푹한 옆구리로 파고들고 헐거운 뱃가죽에 눌러앉았다 뼈가 닳고 있는데 모래가 날린다 모래는 어느 구석에 또 쌓여서 불빛을 부르고 휘파람을 부르고 우리가 다시 사랑을 한다면 태양보다 뜨거운 검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사랑을 한다면 어..
2021.07.29 -
김중일 「불면의 스케치」
늙은 고양이 한마리가 아름답게 무뎌진 발톱으로 분리수거된 비닐을 뜯자 구름과 모래가 뒤섞인 저녁이 툭 터져나왔다. 오래 자란 수염을 태운 혹독한 냄새를 풍기며. 오랜 정전 속에서 매일 우리는 함게 모여 촛불을 불었다. 훅 태양이 한쪽으로 길고 까맣게 누운 사이, 우리집에는 검은 모자를 뒤집어쓴 이방인처럼 어젯밤이 찾아와 뜬눈으로 묵어갔다. 꺼진 줄 알았던 촛불은 되살아났다. 촛불과 촛불 사이에 놓인 침대 입술과 입술 사이로 빼문 허연 혀처럼 흘러나와 있는 단 한 조각의 미명 수북한 음모는 우리를 길 위에 그려넣던 그가 너무나 지루해서 연필을 쥔 채 깜빡 졸았던 흔적 창문이라는 맨홀 속으로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우리는 산산이 부서져 서로 뒤섞이며 떨어진다. 지붕 위로 촛농처럼 비가 떨..
2021.07.15 -
이용임 / 감기
이용임 / 감기 바다가 검게 탄 늑골을 휘며 울고 있다 물로 목을 헹구고 맨발에 모래를 묻히며 숲으로 걸어간다 한쪽 속눈썹이 젖은 소나무들이 검록색으로 기울어 있다 한 대 맞은 거니, 너도 가지마다 말갛게 앉은 바람의 발뒤꿈치를 만지자 핏줄을 따라 파랗게 도드라지는 신열의 뿌리 밤마다 벌떡 일어나 앉는 잠의 가슴골에 흥건한 식은땀 가릉가릉 가슴께에 끓는 파도가 하얗게 몰려오고 사라지고 발가락에 젖은 모래들이 오한에 떨고 입이 비뚤어진 소나무들이 씹다 버린 연애처럼 바닥을 쓴다 모서리마다 뒤척거리며 잠시 흰 등을 보이다 어두워지는 히늘 혹으로 불거져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쿨룩 감은 눈동자를 치며 날아간다 반 뼘 비린내가 마른 풍경을 왈칵 구겨 쥐는 밤 희끗희끗한 어둠을 내려다..
2020.08.18 -
김재훈 / 월식
김재훈 / 월식 너는 너의 바깥에 서 있었다 손에 쥔 모래를 표정 없이 떨어뜨리는 소녀가 생각 없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먹 속의 모래가 모두 빠져나간 뒤에 문득 놀라 빈 손바닥을 펼쳐 볼 때 처음 들른 여인숙 방의 형광등 스위치를 더듬듯이 너는 내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갔다 온 거니 손이 차구나 김재훈 / 월식 (미등록, 문학동네 2011.겨울, 문학동네, 201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02 -
임솔아 / 모래
임솔아 / 모래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 스팸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 난간 아래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떨어지라고 응원해주었다 내가 키우는 담쟁이에 몇 개의 잎이 있는지 처음으로 세어보았다 담쟁이를 따라 숫자가 뒤엉켰고 나는 속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술래는 숨은 아이를 궁금해하고 숨은 아니는 술래를 궁금해했지 나는 궁금함을 앓고 있다 깁스에 적어주는 낙서들처럼 아픔은 문장에게 인기가 좋았다 오늘은 세상에 없는 국가의 국기를 그렸다 그걸 나만 그릴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서 벌거벗은 돼지 인형에게 양말을 벗어 신겼다 돼지에 비해 나는 두 발이 부족했다 빌딩 꼭대기에서 깜빡거리는 빨간 점을 마주 보면 눈을 깜빡이게 된다 깜빡이고 있다는 걸 잊는 방법을 잊어..
202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