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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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빛」
― 너는 아름답다는 말이 되게 쉽게 나오더라 ― 그게 나쁜 일인가 너는 화면을 보지 않은 채 대답을 한다 그쪽은 지금 봄이라고 했던 것 같다 창밖이라도 보고 있는 것이겠지 가득 핀 벚꽃이 바로 보이는 곳이라 했다 나는 실험동물이 새끼를 밴 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너는 그걸 듣고 아름답다고 했던 것이다 ― 뭘 보고 있는 건데 ― 아무것도 내 오른쪽으로는 남극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희거나 푸른 것만 가득해서 가끔은 이 모든 것이 꿈속의 장면 같다 너를 직접 만나 이야기한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 돌아오면 우리 바다에 갈까? ― 여기가 물 반 얼음 반인데 무슨 바다야 우리는 이야기했다 식물원이나 미술관, 바닷가와 공원, 이미 가봤지만 다시 가보고 싶은 곳들에 대해, 다시 가서 다시 보고 ..
2022.04.27 -
강혜빈 「밤의 팔레트」
노랑과 옐로는 언니였다가 누나였다가 원피스를 바꿔 입다가 넘어지기도 하지 그런 언니는 이미 샀는데 그런 누나는 이미 옷장에 물방울무늬야 착하지 동그라미는 동그라미인 척도 잘하지 무지개보다 레인보우에 가깝다는 이야기 만져보면 비슷할 수도 있어 견딜 수 없는 색깔을 골라보자 수염 난 축구공이 굴러간다 보건실에서 몰래 기다리는 짝꿍 남자애들이 웃으며 뺑뺑이를 타는 동안 지그재그 반복되는 재채기 생일에는 가족사진을 다시 그릴 수밖에 아무도 귀가 없어서 다행이야 노랑과 옐로는 너무 많은 밤을 오렸다 성별이 다른 별을 꿰매는 건 위험해 우리는 틀린그림찾기처럼 조금만 달랐는데 왜 아들은 두 글자일까 살아 있는 물방울들은 방금 다 외웠어 나와 언니를 섞으면 하얗게 된다 나에게 누나를 바르면 까맣게..
2022.04.20 -
유진목 「로스빙」
우리가 도착한 곳은 여러 채의 방갈로가 공중에 떠 있는 해안가였다. 방갈로는 기둥을 세워 공중에 띄우고 만조에 물에 잠기지 않도록 했다. 여기에 아버지가 살았어? 로스빙은 그렇다고 내게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어린아이를 버린 적이 있다. 어린아이를 버리고 서울의 당구장에서 내기 당구를 쳤다. 어머니는 소파의 모서리를 뜯으며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방갈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모두가 가족처럼 보였고 모두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 로스빙은 화물칸에 있으면서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상자들 사이에 있었다. 그중에 로스빙이 가장 컸다. 방갈로에서 나온 여자에게 나는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자는 고개를 내젓고 사진을 물..
2022.01.20 -
유진목 「로스빙」
당시 우리집은 살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걷기엔 멀고 자전거를 타기엔 알맞은 거리로 나는 매일 저녁 자전거를 타고 살구 킬로미터를 달려갔다. 로스빙은 자전거의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달리면서 해가 지는 저녁을 돌아나와 함께 집으로 오곤 했다. 로스빙은 꿈에서 온 개였다. 그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로스빙은 베개맡에 앞발을 세우고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현관에 등롱을 걸어 문간을 밝히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도착했을 때 어떠세요 아버지 마음에 드세요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등롱이 아니었으면 못 찾았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더 말이 없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집에서 작별하고 싶었다. 달리 올 사람도 ..
2022.01.20 -
조해주 「낭독회」
어두운 방에서 그가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고 나는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촛불이 어둠을 낫게 할 수 있나요? 어둠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촛불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가 눈부셨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며 왼쪽에서 오른쪽 페이지를 읽어나갔다. 우기를 견디는 나무가 다 뽑혀 나가지 않은 것을 일종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를 견디는 어둠이 다 휩쓸려 나가지 않은 것을 언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은 엉키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풀어지지 않는 것. 나누어지지 않는 것. 손바닥과 손바닥이 겹치고 또 겹치다가 빈틈없이 메워지는 마음이 된다면 그것이 어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둠 속에서 형태가 남아 있던 손이 몰래..
2022.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