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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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덕 「사월 비」
쓰다듬거나 모으지 않아도 괜찮아 샌드위치를 반으로 자르고 빠져나온 아보카도를 줍고 들기 남김없이 먹기 손에서 손 아닌 걸 빼 보세요 무엇이 남는지 무엇이 가는지 무엇이 소리치는지 보고 그래도 두세요 그러니까 궁금해하지도 따뜻해지지도 움켜쥐지도 않기 세계는 이미 한 번 죽은 재료들 열렬하게 포기해 상한 냄새를 좋아해요 전등의 것도 식탁의 것도 아닌 그림자가 손바닥에 떠 있다 의지 없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오늘은 우산을 들고 좋아하는 샌드위치 가게에 갈 거야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갈 거야 이마에 떨어진 빗방울만 믿고 비가 오는구나 작게 뱉어 볼 것 떨지 않아도 좋지만 떨어도 좋다 김연덕, 재와 사랑의 미래, 민음사, 2021
2021.08.19 -
김연덕 「라틴크로스」
줄지어 선 유리잔.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불빛과 짧은 보상처럼 아름다운 중국식 소켓을 본다. 참는 손님도 참아주는 손님도 없는 이곳은 돌발 행동 직전의 소켓에게만 허락되는 삶. 적의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무엇을 삼켜 내듯 환하게 멈추고 흔들리는 방. 몇 시에 닫아요? 주인에게 묻지만 대답 대신 위험한 액체로 소독된 유리잔이 두 개 세 개 서 있다. 천장보다 높은 선반을 상상하는 자세로 깨끗하게 비어 있다. 나는 잘 참는 사람이고 설명할 수 없는 의지 고전적인 열성으로 어제까지 참았는데 끝까지는 못 참아 이상하고 슬프게 화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서없이 찢겨진 중국 책이 되었습니다. 영원히 어린 소수의 외국 사람 순정한 마음을 돌려받지 못했다. 완전히 잃지도 못했다. 어째서 오래..
2021.08.19 -
이민하 「비어 있는 사람」
창살만 남은 늑골 사이로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금은 저녁일까 아침일까 십 년 만에 눈을 뜬 것만 같아 끄고 잠든 별빛처럼 지붕도 함께 사라진 것일까 이대로 일어날 수 없다면 의사들이 달려올까 용역들이 달려올까 밤에 지나는 사람은 플래시를 들고 오고 용감한 휘파람으로 제 몸을 끌고 오고 담력 테스트를 하려고 사람들이 몰려올지도 몰라 죽어 버린 장소는 죽은 사람보다 무섭고 벽이 헐리기 전까지 깃드는 건 소문과 어둠뿐인지도 몰라 숨어 있기 좋아서 고양이들은 움푹한 옆구리로 파고들고 헐거운 뱃가죽에 눌러앉았다 뼈가 닳고 있는데 모래가 날린다 모래는 어느 구석에 또 쌓여서 불빛을 부르고 휘파람을 부르고 우리가 다시 사랑을 한다면 태양보다 뜨거운 검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사랑을 한다면 어..
2021.07.29 -
박준 「세상 끝 등대 3」
늘어난 옷섶을 만지는 것으로 생각의 끝을 가두어도 좋았다 눈이 바람 위로 내리고 다시 그 눈 위로 옥양목 같은 빛이 기우는 연안의 광경을 보다 보면 인연보다는 우연으로 소란했던 당신과의 하늘을 그려보는 일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8
2021.07.15 -
박준 「84p」
받아놓은 일도 이번 주면 끝을 볼 것입니다 하루는 고열이 나고 이틀은 좋아졌다가 다음 날 다시 열이 오르는 것을 삼일열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젊어서 학질을 앓은 주인공을 통해 저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다행히 그는 서른 해 정도를 더 살다 갑니다 자작나무 꽃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암꽃은 하늘을 향해 피고 수꽃은 아래로 늘어진다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전부터 알고 있던 것입니다 늦은 해가 나자 약을 먹고 오래 잠들었던 당신이 창을 열었습니다 어제 입고 개어놓았던 옷을 힘껏 털었고 그 소리를 들은 저는 하고 있던 일을 덮었습니다 창밖으로 겨울을 보낸 새들이 날아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온몸으로 온몸으로 혼자의 시간을 다 견디고 나서야 겨우 함께 맞을 수 있는 날들이 새..
2021.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