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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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샤워
김륭 / 샤워 열대식물을 생각했다. 당신은 마음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고 했다. 당신이 아름다워 보였지만 내가 아름다워지는 건 아니었다. 털이 북슬북슬한 몸으로 마음까지 걸어 들어갈 궁리를 하다 보면 사막과 친해졌다. 짐승이란 말을 들었다. 나는 손잡이가 몸에 달려 있었고 사막여우 같은 당신의 마음이 걸어 다니기엔 더없이 좋아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벌레잡이통풀, 끈끈이주걱, 파리지옥…… 사랑은 어디에 달려 있던 손잡이일까, 하고 궁금해졌다. 당신의 울음에 기여한 문장들로 샤워를 하면서 열대식물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당신을 너무 착하게 살았다. 나는 꽤나 괜찮은 짐승이고 그래서 쫓겨난다고 생각했다. 김륭 / 샤워 (김륭, 원숭이의 원숭이, 문..
2020.07.29 -
김사인 / 나비
김사인 / 나비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치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 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나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김사인 / 나비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29 -
박준 / 발톱
박준 / 발톱 중국 서점이 있던 붉은 벽돌집에는 벽마다 죽죽 그어진 세로균열도 오래되었다 그 집 옥탑에서 내가 살았다 3층에서는 필리핀 사람들이 주말마다 모여 밥을 해먹었다 건물 2층에는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이 모이는 당구장이 있었고 더 오래전에는 중절수술을 값싸게 한다는 산부인과가 있었다 동짓달이 가까워지면 동네 고양이들이 반지하 보일러실에서 몸을 풀었다 먹다 남은 생선전 같은 것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면 어미들은 그새 창밖으로 튀어나가고 아비도 없이 자란 울음들이 눈을 막 떠서는 내 발목을 하얗게 할퀴어왔다 박준 / 발톱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03 -
신달자 / 늦은 밤에
신달자 / 늦은 밤에 내가 울 때 왜 너는 없을까 배고픈 늦은 밤 울음을 참아내면서 너를 찾지만 이미 너는 내 어두운 표정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나는 풀이 죽어 마음으로 너의 웃음을 불러들여 길을 밝히지만 너는 너무 멀리 있구나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신달자 / 늦은 밤에 (안도현, 천년동안, 시아출판사, 200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4 -
허연 /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허연 /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보이지도 않은 길 끝에서 울었다. 혼자 먹은 저녁만큼 쓸쓸한 밤 내내 나는 망해가는 늙은 별에서 얼어붙은 구두끈을 묶고 있었다. 부탄가스 하나로 네 시간을 버티어야 해. 되도록 불꽃을 작게 하는 것이 좋아. 어리석게도 빗속을 걸어 들어갔던 밤. 잠결을 걸어와서 가래침을 뱉으면 피가 섞여 나왔다. 어젯밤 통화는 너무 길었고, 안타까운 울음만 기억에 남았고, 나는 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알고 계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지대의 나무들을 또 얼마나 흔들리는지.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허연 /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허연, 불온한 검은 피,..
202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