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임 / 연애의 시간
2020. 8. 18. 09:57ㆍ同僚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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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임 / 연애의 시간
창문이 흰 계절이 온다
몸을 열자 동백나무 우거진 숲
당신이라는 검푸른 관자놀이를 통과하는
한 발의 총성
산산히 깨진 당신을 밟고
맨발로 당신이라는 시간을 걷는다
땀구멍마다 침투하는 당신의 쇳소리가
밤마다 내 몸을 흔든다
모가지째 뚝뚝 당신이 순교한다
나는 가장 벙글지 않은 당신을 주워
탁자 위 꽃병에 꽂는다
이미 죽은 당신의 입술이 벌어지며
그윽한 향기가 흘러나온다
시시각각 피어나며 시드는
당신이라는, 붉은, 짙은, 어지러운,
너덜너덜한 꿈의 자락을 들어 냄새를 맡으면
곧 자욱한 눈보라
으스스한 핏빛 잎들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계절
창문이 흰 계절 위에 손가락으로 당신을 쓴다
가장자리부터 얼어붙는 이름을 쓴다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이용임, 안개주의보, 문학과지성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