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김경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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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 분홍 주의보
김경주 / 분홍 주의보 자다가 깨어나 몸에서 악취가 나는 것 같아 자주 찬물에 샤워를 한다 침팬지가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웃고 있는 것은 공포를 표현하는 것이라는데 술자리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늘 그 말이 생각난다 그런 날 나는 너무 자주 웃었거나 화장실에서 오줌 누고 돌아온 후 방금 자지를 주물럭거렸던 손으로 여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꼬락서니다 마침내 복서의 입에서 마우스피스가 툭 떨어진다 하― 그보다 마일드한 담배. 끝까지 가보지 않아도 좋았을 지루한 12라운드를 다 지켜본 기분이랄까 심판이 승자의 팔을 번쩍 들어 올려주지 않고 다가가서 선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자넨 자네 삶과 밀월을 즐기는 것 같군그래." 챔피언이 그를 보며 침팬지처럼 헐떡거려준다 그런 그로테..
2020.11.29 -
김경주 / 비정성시(非情聖市) ― 그대들과 나란히 무덤일 수 없으므로 여기 내 죽음의 규범을 기록해둔다
김경주 / 비정성시(非情聖市)* ― 그대들과 나란히 무덤일 수 없으므로 여기 내 죽음의 규범을 기록해둔다 비 내리는 길 위에서 여자를 휘파람으로 불러본 적이 있는가 사람은 아무리 멋진 휘파람으로도 오지 않는 양이다 어머니를 휘파람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대대장을 휘파람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간호사를 휘파람으로 불러 세워선 안 된다 이것들을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이것이 내가 여기 들어온 경위다 외롭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음악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은 휘파람을 잘 분다 해가 뜨면 책을 덮고 나무가 우거진 정원의 구석으로 가서 나는 암소처럼 천천히 생각의 풀을 뜯을 것이다 나는 유배되어 있다 기억으로부터 혹은 먼 미래로부터. 그러나 사람에게 유..
2020.11.29 -
김경주 / 기담(奇談)
김경주 / 기담(奇談) 지도를 태운다 묻혀 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 있다 그 잠을 이식한 화술은 내 무덤이 될까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人形)을 본다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 인간에겐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 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 김경주 / 기담(奇談) (김경주, 기담, 문학과지성사, 200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9 -
김경주 / 폭설, 민박, 편지 1 ― 「죽음의 섬Die Toteninsel」, 목판에 유채, 80×150cm, 1886
김경주 / 폭설, 민박, 편지 1 ― 「죽음의 섬Die Toteninsel」, 목판에 유채, 80×150cm, 1886 주전자 속엔 파도 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배들이 먼 곳의 물소리를 만지고 있었다 심해 속을 건너 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 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목단 이불을 다리에 말고 편지(片紙)의 잠을 깨워나가기 시작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이 되었다 쓰다 만 편지들이 불행해져갔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운 것들이 쓰려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끓기 시..
2020.10.15 -
김경주 / 백 에이커의 농장, 백 에이커의 숲
김경주 / 백 에이커의 농장, 백 에이커의 숲 화분에 청진기를 대는 과학자 해저의 무덤들을 떠올린다 해바라기 밭으로 고양이가 기절한 새끼 쥐를 물고 간다 심장을 파먹는다 수술실 창문으로 훔쳐본 축 늘어진, 팔 한쪽 몇 년 만에 돌아온 거미가 거미줄에 청진기를 대본다 무심하게 식기를 닦는다 김경주 / 백 에이커의 농장, 백 에이커의 숲 (김경주,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지성사, 2014)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