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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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인 「마진 콜」
소원의 밀도가 너무 높아 곪아버린 귓바퀴를 은하수에 씻느라 바빴단다 그새 인간들이 빌고 또 빌어서 이제 너희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단다 아직도 질척하구나 롯데리아에 온 기분이다 내가 말 걸고 싶어지는 이들은 그래, 너처럼, 아무것도 빌지 않는 아이란다 눈동자는 도시의 불빛으로 환하지만 새벽 백사장의 포말만 생각하고 빈약한 가슴에는 별 없는 우주를 채워 넣은, 속이 까맣고 낯이 하얀 너란다 떨지 말렴 이건 스팸메일도 아파트 안내방송도 아니니 그러니 물을게 너 네가 아주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으니? 떨어지면 끝날 것 같으니? 여기서 너를 밀어 봤자 부서지지도 않을진대 몸이란 거 으깨지고 마는 거지 소소하게…… 그래도 재가 되면 훨씬 가벼워질 테니 다이어트는 성공하겠구나 아니 떨지 말렴 너는 유리로..
2022.04.20 -
유진목 「로스빙」
우리가 도착한 곳은 여러 채의 방갈로가 공중에 떠 있는 해안가였다. 방갈로는 기둥을 세워 공중에 띄우고 만조에 물에 잠기지 않도록 했다. 여기에 아버지가 살았어? 로스빙은 그렇다고 내게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어린아이를 버린 적이 있다. 어린아이를 버리고 서울의 당구장에서 내기 당구를 쳤다. 어머니는 소파의 모서리를 뜯으며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방갈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모두가 가족처럼 보였고 모두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 로스빙은 화물칸에 있으면서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상자들 사이에 있었다. 그중에 로스빙이 가장 컸다. 방갈로에서 나온 여자에게 나는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자는 고개를 내젓고 사진을 물..
2022.01.20 -
유진목 「로스빙」
당시 우리집은 살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걷기엔 멀고 자전거를 타기엔 알맞은 거리로 나는 매일 저녁 자전거를 타고 살구 킬로미터를 달려갔다. 로스빙은 자전거의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달리면서 해가 지는 저녁을 돌아나와 함께 집으로 오곤 했다. 로스빙은 꿈에서 온 개였다. 그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로스빙은 베개맡에 앞발을 세우고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현관에 등롱을 걸어 문간을 밝히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도착했을 때 어떠세요 아버지 마음에 드세요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등롱이 아니었으면 못 찾았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더 말이 없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집에서 작별하고 싶었다. 달리 올 사람도 ..
2022.01.20 -
조해주 「낭독회」
어두운 방에서 그가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고 나는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촛불이 어둠을 낫게 할 수 있나요? 어둠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촛불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가 눈부셨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며 왼쪽에서 오른쪽 페이지를 읽어나갔다. 우기를 견디는 나무가 다 뽑혀 나가지 않은 것을 일종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를 견디는 어둠이 다 휩쓸려 나가지 않은 것을 언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은 엉키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풀어지지 않는 것. 나누어지지 않는 것. 손바닥과 손바닥이 겹치고 또 겹치다가 빈틈없이 메워지는 마음이 된다면 그것이 어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둠 속에서 형태가 남아 있던 손이 몰래..
2022.01.17 -
박민혁 「모호한 슬픔」
기다리는 전화가 있었나 봐요, 감추어 둔 희망을 들키는 기분 미래는 너무 많은 오늘을 약탈해 가고 있다 결국 너는 쥐가 난 슬픔 쥐가 난 왼손을 오른손으로 만졌을 때의 낯선 감촉 같은 거 이제 너는 공휴일에서 제외된 기념일 같다 한 여자애의 전화번호를 암기하는 일 너에게 없던 비립종 같은 걸 사랑하는 일 애인이 너의 이름을 발음할 때 멀미가 느껴지는 일 사랑은 왜 오전과 오후 사이에서만 기생하는지 이런 불가능한 시간이라니 운명이 뿌리고 간 겨우 한 자밤의 슬픔에 나는 이렇게도 엄살을 부리나 아직도 나, 내가 낳은 슬픔을 두고 훗배앓이 중 어쩔 건데, 이런 감정 모든 연애의 끝은 궁금한 궁금하지 않은 부모님의 굴욕 같은 거 나의 절망 역시 사행성이 짙습니..
2022.01.17